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13)
보스톤코리아  2024-01-29, 11:29:11 
이어지는 내용은 조선시대의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형성된 사회상에 비추어보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역사는 그 당시의 제도와 사회관념으로 볼때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가 있다. 고려 초기까지도 근친혼과 근친간에 많은 사통이 있었다. 즉 신라시대의 관습과 성풍속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실은 진흥왕의 후궁일 당시도 설화랑과 사통을 하였다. 그들의 사통은 미실이 입궁이 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물론 설화랑이 7세 풍월주에 오르기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화랑의 결혼 전후, 미실과의 관계의 한 단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은, 진흥왕을 비롯하여 미실, 동륜태자, 금륜태자, 설화랑, 위화랑, 준화, 준모, 미생, 미모, 모랑 등이다. 그들의 혈연적 관계와 성적 관계가 조금 복잡하게 얽혀있긴 하지만 다만 그것은 당시의 사회상으로 보는게 좋다.   
때는 571년,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 준화는 과부가 되어 딸 준모俊毛와 둘이 살고 있었다. 준화는 18세 무렵인 553년 경에 3세 풍월주가 된 모랑공과 결혼하였다. 555년 어느날, 모랑이 낭도들을 이끌고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국토순례 도중 비사벌에서 병을 얻어 객사하였다. 그래서 준화는 나이 20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어린 딸 준모와 둘이 살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571년 무렵, 미실은 동륜태자와도 사통을 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임신까지 하게 되었고, 동시에 왕의 부름을 받아 입궁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륜은 계속 미실을 원하였고, 들통이 날까봐 염려한 미실은 동생 미생을 불러 동륜태자와 함께 밖으로 나가 어색을 하라고 일렀다. 그 작전과 병행하여 준화의 딸 준모를 동륜태자에게 바치고 자신은 그 자리를 면하려고도 했다. 물론 준모는 색공을 하게 되었다. 해가 지나 572년 3월 동륜태자가 보명궁주의 담장을 넘다가 개에게 물려서 죽은 후 진흥왕의 차남 금륜(후에 진지왕)이 태자로 책봉되었고, 미실은 또 준모를 금륜에게 바치려고 하였다(당시는 설화랑과 준화가 부부가 되어 있었으니 준모는 설화랑의 의붓딸이었다). 이에 설화랑 부부는 준모가 동륜태자를 섬긴 일을 진흥왕이 이미 알고 있는데, 또 금륜을 섬긴다면 자신들을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핑계로 준모에게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라고 일렀다. 그러나 준모는 부모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 후일 설화랑이 준모를 꼬드겨 사통을 하였다. 게다가 준모는 설화랑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이를 안 준화는 “태자에게 바치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가 갖은 것은 이 무슨 도리인가!” 라며 격노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설화랑은 미실에게로 달려가 엎드려 구걸하였다. 미실의 도움으로 ‘사지死地’ 에서 벗어난 설화랑은 더욱 미실을 섬겼다. 미실은 임신한 준모를 동생 미생에게 아내로 삼게 하였다. 준모는 달이 차서 설화랑의 딸 미모美毛를 낳았는데, 그 때 낭도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편 문노468) 는 자신의 낭도들을 데리고 세종을 따라 변방에서 전공戰功을 많이 세우고 있었지만 변변한 위位를 얻지 못했다. 당시 문노는 풍월주 설화랑의 휘하에 들어가지 않고, 따르는 낭도들을 데리고 독자적으로 일문一門을 세워 세종을 따라 변방을 돌고 있었다. 결국 화랑도는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설화랑파는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했고, 문노 일파는 청의淸議가 자신들에게 있다며 서로 상하를 다투었다. 이에 미실은 화랑도의 분파를 염려하여 세종에게 난국難局을 타개하고 서로 화합하도록 종용했지만, 세종은 그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설화랑은 미실의 심복이었고 문노는 세종을 따르는 심복이었기에, 부부인 미실과 세종이 함께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것같았지만, 화랑도는 한 동안 두 파로 갈라져서 서로 (결국은 발전적으로) 경쟁하였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했다. 그래서 국인들은 그들을 호국선護國仙이라 불렀다. 한편 설화랑의 낭도들은 향가鄕歌를 잘하고 청유淸遊를 즐겼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운상인雲上人이라 불렀다.
당시는 진흥왕 치세 말엽으로 왕은 풍질을 앓으면서 정사를 돌보지 못했고, 다만 왕후 사도, 후궁 미실, 보명, 옥리, 월화 다섯 궁주들과 즐거움만 탐닉했다. 그래서 내정은 사도왕후와 미실이 마음대로 했고, 외정은 세종과 설원, 미생이 휘둘렀다. 

468) 8세 풍월주를 역임한 문노는 신라시대를 통틀어 박칠숙朴柒宿(2등급인 이찬의 벼슬로 아찬 석품과 함께 631년에 모반하였다가 참수형을 당했고, 9족도 함께 처형당했다. 6등급의 석품은 백제 국경까지 도주했다가 처자식을 보기 위해 나뭇꾼으로 변장하여 돌아왔다가 잡혀서 역시 처형되었다) 과 함께 격검술擊劍術이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수많은 무인, 무사, 화랑도들이 저마다 신출귀몰하듯 무예의 기량을 발산하고 명멸했던 시대속에서 그들은 단연코 최강자로 각인되었고, 그렇게 전해오고 있다. 
문노는 골품이 없는 한을 오로지 무예 수련으로 발산하듯 격검술이 신기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모는 비조부와 문화공주인데, 어머니 문화공주의 부모가 찬실(가야 북국왕)과 야국녀(일본녀?)이다. 즉 야국녀가 후궁이었기에 문화공주가 (신라에 와서) 골품을 받지 못했고, 또한 문화공주는 문노의 조부 호조(유능한 외교사신)의 첩으로 신라에 와서, 아들 비조부와 사통하여 문노를 낳았다. 문노는 후일 40세 무렵에 거칠부의 딸 윤궁과 결혼하여 골품을 얻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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