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3세 풍월주風月主 용춘공龍春公(15) |
보스톤코리아 2020-03-09, 10:49:08 |
김용춘은 말년에 ‘산궁山宮’에서 거문고와 바둑을 즐기며 살았다. 그런데 이 산궁이 그냥 작은 오두막이 아니라 큰 ‘별장’ 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천명과 호명 두 궁주들과 5명의 시첩侍妾들의 시중을 받으며 안락한 여생을 즐기다가 70세에 죽었다. 몇 명의 자손들이 함께 살았는지의 기록은 없지만, 그는 적자로 받아드린 김춘추 외에 서자 5명과 서녀 18명이 있었고, 또한 나머지 자손은 다 기록하지 않지만 모두 귀하게 영달했다고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도 화랑세기에 기록된 서자들 외에 다수의 서자들을 기록하고 있다. 짐작해보건데 김용춘의 많은 자손들도 ‘산궁’에서 함께 살았을 개연성이 있다. 산궁의 규묘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처첩들의 숫자로 보아 작지 않았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렇듯 화랑세기에는 당시의 호화주택에 관하여 몇 군데 기록하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에는 많은 초호화주택들이 있었다. ‘금입택’ 으로 35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헌에 제시된 주택의 실제 숫자는 39채이다. 그런데 신라 어느 무렵의 주택인지의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재매정택’ 에 대해서는 김유신의 종가라는 설명이 있다. 그리고 화랑세기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입택 중에서 수망택이 등장한다. 수망택은 17세 풍월주를 역임한 염장廉長의 집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35개(39개)의 금입택이 600년을 전후하여 건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고찰은 5세 풍월주 사다함조에서 상세하게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간략하게 살펴 보겠다. 금입택이란, 금박으로 입힌 집이거나 금이 바리바리 들어가는 집, 또는 그 둘 모두 상징하는 금박으로 입힌 집에 금이 바리바리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김염장과 김유신은 염장이 아홉 살 위로 동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염장은 김유신이 15세 풍월주로 재임할 때 부제로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부제가 차기 풍월주의 위를 이어 받는데 반하여 16세 풍월주는 보종으로 이어졌고, 염장은 보종의 집에 들어가서 ‘집사’ 노릇을 하면서 재물을 끌어(私取) 모았다. 그가 모은 재물의 규묘가 화랑세기에 “당시 사람들이 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이라 했는데 금金이 들어가는 모습이 홍수와 같다고 해서 이른 말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염장의 집 수망택은 강물이나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에 지어졌다기 보다는, 그의 집으로 재물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백성들에 의해서 붙혀진 택명宅名임을 알 수 있다. 염장廉長은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로 재물의 욕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또한 5세 풍월주 사다함조에는 사다함이 방탕한 어머니 금진金珍과 함께 살다가 나와서 독립한 이후로는 “(사다함이) 사택賜宅과 본장本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사택의 규묘를 알 수는 없지만, 이 집은 분명 임금이 내린 집으로 생각된다. 법흥왕이 후궁으로 데리고 있다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내보냈던 금진에게 준 것으로 규묘가 상당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본장은 금진과 사다함이 본래 살던 집으로 사료되긴 하지만, 농막장庄으로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농장에 딸린 농막/별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김유신의 친동생 김흠순이 12세 풍월주를 역임한 보리공(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의 증조부)의 집에 간 장면에 19세 풍월주 김흠순조에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김흠순金欽純(598,9 ~ 680년)이 보리공의 딸 보단낭주菩丹娘主를 어떻게 만났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아내로 맞이하게 된 내용이다. 김흠순은 18세에 전방화랑이 되어 여러 상선(전임 풍월주)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김흠순이 보리공의 집을 찾았을 때 보리는 정자 위에 있었다. 그리고 김흠순은 거기서 문안했다. 그때 정자 아래 연못가에는 16세의 아름다운 보단이 동생 예원을 데리고 나와서 놀고 있었다. 당시 예원은 6살이었다. 예원은 보리의 적자였고 후일 20세 풍월주가 되었다. 화랑 중에서도 가장 상층부에서 조직을 이끄는 김흠순은 의기가 양양하였고 자부심 대단하였다. 하지만 상선 보리공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축하와 격려’의 말을 듣고 있었으니 눈길은 자연히 정자 아래 연못가로 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선녀(원문에는 신선神仙)같은 보단이 들어왔다. 그녀가 그윽하게 풍기는 아름다운 자태에 빠진 김흠순은 황홀감에 젖어 곁눈으로 보단만 훔쳐 보았다. 보리공이 한 말은 전혀 기억도 없이 김흠순은 정자를 내려와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보리공의 집은 빈객을 맞이할 수 있는 정자가 연못가에 있었다. 분명 본채와 부속채는 따로 있었을 것이니 그 집의 규묘를 상상해 볼 수가 있다. 보리의 집이 당시의 금입택 중의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대저택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김흠순은 며칠 후 보리공을 다시 찾아와서 사위가 되길 청하였고 그는 보단과 결혼하여 아들 일곱을 두었다(여섯째 아들 김원선은 29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리고 흠순의 세째 아들이 홀로(염장공의 딸)를 버리고 사촌인 영광令光(김유신의 딸)과 혼인하여 영윤令胤을 낳으니, 그가 곧 황산벌전투에서 전사한 반굴이다.290) 뿐만 김흠순은 보단의 동생 이단도 후처로 맞이하였다. 290) 삼국사기에는 김영윤의 아버지는 급찬 반굴이고 할아버지는 흠춘(또는 흠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화랑세기에는 영윤과 반굴이 동일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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