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76 |
화랑세기花郞世紀, 11세 풍월주風月主 하종夏宗(17) |
보스톤코리아 2019-05-27, 10:48:17 |
12세의 어린 나이로 신라의 제26대왕으로 오른 진평왕은 ‘여인천하’ 에 묻혀서 지냈다. 먼저 왕실의 가장 어른인 태상태후 사도(진흥왕의 정비)는 그의 조모였다. 그리고 생모인 만호태후와 전왕前王 진지왕의 왕비 지도태후가 있었다. 또한 좌우후의 위位를 가지고 미실과 보명이 색도를 하였다. 진평왕이 579년 왕위에 오른 후 태상태후 사도법주思道法主가 584년까지 섭정을 하였다. 그리고 사도는 미실을 법운法雲으로 삼았기에 거의 모든 정사를 미실이 장악하였다. 동시에 아양공주가 미실의 독주를 묵인하지 않고 가야파를 이끌며 세력을 나누고 있었다. 아양은 사도의 딸로 김무력의 부인이었다. 김서현은 그들의 아들이고, 김서현은 김유신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진지왕의 왕후였던 지도태후는 대원신통이었지만 사도와 만호사이에서 문노정파文弩正派를 지원하였다. 이 여인들 중 사도와 미실과 아양은 대원신통이며 사도가 수주首主였다. 지소의 딸인 만호공주는 진골정통의 수주였다. 지도는 흥도(옥진의 딸이며 사도의 동생) 의 딸로 대원신통이었지만 지소태후가 생전에 거느리다가 딸 만호에게로 넘긴 가장 세력이 컸던 화랑도들인 문노정파를 지원하였다. 579년, 화랑도를 이끌고 진지왕 폐위거사에 크게 공헌한 문노는 8세 풍월주로 취임하였고, 화랑도 및 군사들을 지휘하여 거사를 주동한 노리부는 상대등에 올랐다(579 ~ 588년). 진지왕 재위 중에는 거칠부(황종, 문노의 장인)가 사도의 세력에 의해 상대등(576 ~ ?)으로 추대되어 있었지만, 그는 노쇄하여 대등인 노리부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579년 사망할 때까지 상대등의 위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어린 백정이 진평왕으로 오를 당시 조정은 여인천하였다. 태상태후 사도를 비롯한 3태후와 진흥왕의 후궁으로 진평왕의 좌우후가 된 미실과 보명, 그리고 가야파의 배경으로 정파의 한 축을 잡은 아양공주가 그들이다. 당시의 상황을 화랑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때 궁중에는 삼태후가 있어 행정을 했고, 대왕은 어질고 효성스워서 어른들의 명을 받들어 따랐다. 그러므로 낭도 중 승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태후궁에 많이 붙었다. 태상태후인 사도법주는 미실궁주로서 법운을 삼았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이 미실궁에서 많이 나왔다. 그런데 법주의 딸 아양공주阿陽公主가 곧 서현의 어머니였기에 가야파의 태양이 되어 미실의 세력을 나누었다. 만호태후는 진평대왕의 어머니로 더욱 왕의 총애가 있어서 진골정통의 수주가 되었다. 지도태후가 태상과 만호 사이를 출입하며 문노정파를 도왔다.] 이렇게 사도태후가 섭정을 하고 오라비 노리부가 상대등으로 거의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대원신통이지만 문노정파를 지원하고 진골정통의 수주 만호태후를 따랐던 지도태후의 의중을 파악한 비보랑(9세 풍월주를 역임)은 풍월주 하종의 부제였던 보리공을 몰아내고, 지도의 아들(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만호가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용춘은 비록 화랑도 부제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진지왕(폐위가 되긴하였지만…)의 아들이었기에 따르는 낭도들이 많았다. 가야파를 이끌며 당시 전방화랑(화랑도 조직의 서열 3위)의 직책을 맡고있던 김서현이 가야파의 모든 낭도들을 김용춘에게 넘겨주었다. 아마도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와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은 이미 이때부터 합종의 싹이 트고 있지 않았을까? (아직 김춘추와 김유신은 태어나지 않았다) 김용춘金龍春, 김용수金龍樹와 김용춘, 자세한 내용은 13세 풍월주 용춘공조에서 살펴 보겠지만, 여기서는 다만 그들이 ‘형제인가? 동일인가?’ 를 고증해 보겠다. 먼저 화랑세기(13세 풍월주 용춘공조) 에 기록된 몇 가지 “용춘공의 형인 용수전군龍樹殿君은 혹은 동태자의 아들이라고 하고 혹은 금태자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 진실을 알 수 없다.” 동태자는 동륜태자이고 금태자는 금륜태자이다. 금륜은 후에 진지왕이 되었다. 같은 용춘공조에 나오는 대목, “그 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인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당시 진평왕은 후사를 볼 수 있는 나이였지만 마야왕후의 뜻으로 용수를 천명공주와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다. 이와 같이 화랑세기에는 용수와 용춘이 형제로 등장한다. 반면 삼국사기(태종무열왕 즉위조)에는 무열왕이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一云 용수)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삼국유사(왕력편)에는 용춘은 일작一作 용수라고 기록되어 있다. 1145년에 고려인에 의해 완성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와 1281년 편찬한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동일인으로, 신라인 김대문이 신라시대(성덕왕 재위 중 편찬, 702 ~ 737년)에 쓴 화랑세기(필사본)에는 형제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 에 김용수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동일인으로 본다. 화랑세기에는 용수가 용춘의 형으로 천명공주와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은뒤 요절하였다. 화랑세기에는 용춘이 578년에 태어나서 647년에 죽었다. 그렇다면 그의 형인 용수는 그 이전에 태어났다(576년경으로 추측한다). 김춘추가 603년에 태어났기에 아마도 용수는 그 이후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화랑세기의 기록대로 용수가 요절했다면 적어도 27세 이후이다. 한편, 황룡사구층목탑은 645년(선덕여왕14년) 에 건립하였고, 그 탑의 금동찰주본기는 872 ~ 873년에 탑을 중수하면서 기록했다. 230여년에 걸쳐 여러번 중수한 기록인 찰주본기에 김용수가 645년 건립 당시 한 역할이 나온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용수와 용춘을 동일인으로 본다(삼국유사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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