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6. 체로키의 눈물의 길 (3)
보스톤코리아  2015-09-28, 13:53:29 
체로키족의 수난 (계속)
스페인의 침략자 데소토가 미국남부지역을 탐험했을 때부터 스모키산(Smoky Mountain) 어딘가에 많은 금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1832년 한 소년이 워드크리크 (Ward Creek)에서 금조각을 하나 주워 백인 중간상에게 넘긴 사건은 앞으로 체로키족이 당하게 될 길고 힘든 시련의 단초가 되었다. 그 후로 온갖 불한당들이 금을 찾기 위하여 인디언의 집과 땅을 헤집고 다니며 무수히 악행을 저질렀다. 종국에는 체로키족을 아예 스모키산에서 완전히 제거하기를 백인들은 원했다.

동부 체로키족의 추장 주날루스카(Junaluska)는 잭슨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1814년 크리크 전쟁 중 Horseshoe 전투에서 잭슨이 크리크 족에게 죽임을 당할 찰나에 주날루스카 추장이 그의 토마호크 도끼를 휘둘러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주날루스카는 체로키 네이션의 특사자격으로 잭슨을 찾아가서 위기에 처한 체로키를 구해 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지난날 생명의 은인에게 이미 결정된 사실이니 자기로서는 여기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싸늘한 대답만 들려주었을 따름이었다. 주날루스카는 체로키족이 겪는 참상을 직접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보면서 절규하였다. “오, 신이시여, 내가 오늘과 같은 비극이 일어날 것을 호스슈전장에서 미리 알았더라면 미국의 역사는 달리 써졌을 텐데....”라고.

오늘 이 시점에서 젊은이들은 그 때 있었던 일을 잘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백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저항할 수 없는 체로키족으로부터 총검으로 강탈한 것이란 사실을 어린 학생들은 모른다.
강제이주로부터 25년 뒤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전투복을 입은 체로키병사들을 만났다. 강제이주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그들은 단번에 나를 알아보고는 ‘우리들에게 잘해주신 군인’이라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체로키말로 한참을 이야기했는데 1863년 당시 로스가 아직까지 추장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다. 그가 지금까지도 생존해 있는지 궁금하다. 로스야말로 오로지 체로키족의 보호에만 온 몸과 영혼을 바친 참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스콧 장군이 4천명의 정규군과 3천명의 지원병을 끌고 체로키의 땅으로 들이닥쳤을 때에도 몇몇 체로키족은 용케도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나는 그들을 직접 찾아가서 만나고 싶었다. 한 해 두 해 미루다 보니 지금은 기력이 약해져서 그렇게 먼 데까지 갈 수 없게 돼버렸다. 나는 결코 내 총과 칼로 인디언을 해친 적이 없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 가련한 체로키 인디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함으로써 ‘체로키에게 잘해준 병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불한당이 저질렀든지 제복 입은 군인이 행군 나팔소리 속에서 저질렀든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대답해야 한다. 1839년에 흘린 인디언의 피에 대하여 누군가는 설명해야 한다. 추방의 길에서 죽어간 4천명의 무덤에 대하여도 누군가는 설명해야 한다. 나는 그 때의 악몽을 잊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내 눈에 지금도 어른거리는 얼어붙은 땅위로 645대의 마차에 태워져 죽음의 길에 오르는 체로키족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 슬픈 이야기를 잘 전해 주기 바란다. 위대한 심판자가 우리가 저지른 행동을 엄격히 평가하여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기를 바란다. 내 자손들이여, 이것이 내가 약속했던 생일 이야기의 끝이다. 1890년 12월 11일. 

문명화된 5개 부족
Cherokee, Chickasaw, Choctaw, Creek(Muscogee), 그리고  Seminole을 흔히 ‘5개의 문명화된 인디언 부족(Five Civilized Tribes)’로 부른다. 영국계 이민자들의 잣대로 볼 때 유럽의 문명을 받아들여 백인들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인디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시대 조류의 변화를 잘 파악하여 유럽식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존을 계속해 나가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현실에 충실했던 인디언식 개혁주의자인 셈이다. 반대파 크리크 족과는 전쟁을 치루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이들 5개 부족은 유럽 이민자들로부터 인간적인 처우를 받았으며 백인과 결혼하는 예도 많았다. 일부 인디언들은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면서 흑인노예까지 부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0년대에 들어와서는 백인들의 끝모르는 탐욕에 희생되어 모두 고향 땅에서 쫓겨나 홍인종의 땅이라는 의미를 갖는 오클라호마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만다.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이와 같은 강제이주도 일종의 인종청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개 부족중 체로키족이 백인의 생활방식에 가장 가까이 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한 걸출한 인재의 역할이 컸다. 세콰이야(Sequoyah)라는 선각자는 체로키 말을 기록할 수 있는 체로키문자를 고안하였다. 체로키 네이션은 1825년에 이 문자체계를 체로키의 공식문자로 지정하였다. 체로키 네이션은 1828년부터 우스터(Worcester) 선교사와 힘을 합쳐 체로키 네이션의 수도였던 에코타(Echota)에서 ‘Cherokee Phoenix’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신문은 체로키 문자와 영어를 함께 사용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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