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90
보스톤코리아  2015-07-27, 12:10:26 
왜소한 체격이지만 그는 별명과 같이 ‘곰같은 인물’의 정통무도인이다. 그의 별명은 체격이나 체형적인 외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의 우직하고 과묵한 성격과 타인들을 잘 믿고 ‘곰같이 미련하게’ 수련에만 열중하는 그의 성정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조선연무관의 창시자 전상섭과는 달리 멋을 부릴 줄 몰라 신발도 큼지막한 미군군화를 신고 다녔고, 왼손 손가락이 몇개 잘려 나간 관계로 한여름에도 흰 장갑을 끼었다고 제자들이 전한다. 그의 왼손가락들이 잘려나간 연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일설에는 만주에서 살 때 마적단들이 휘두르는 장도를 막다가 잘려 나갔다고 하기도 하고, 또한 동상에 걸린 손에 빙초산(또는 다른 화학약품)이 좋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화상을 입어서 그렇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윤병인은 1920년 5월 18일 만주 봉천(현 심양)에서 태어났다. 무순에서 사설 양조장을 운영했던 윤명근의 둘째로 태어났으며, 생일은 그의 본관인 칠원 윤씨 족보에는 1920년 4월 1일이다.129)  그의 할아버지 윤영현은 경남(통영과 거제)에서 지방수령을 하였는데 ‘을사조약’ 후 일본의 조선 강점의 강도가 더해지자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하였다.
정통무도인으로 정평이 나있는 윤병인은 어릴 때 만주를 유랑하면서 중국무술의 일파인 ‘주안파’를 수련하였다. 그리고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유학을 하였다. 그는 니혼(일본)대학교에서 1941년까지 농학을 전공하였다. 그 때 가라데(공수도)를 배웠으며, 당시 그 학교에는 일본 가라데의 달인 도야마 간켄이 있었다. 도야마는 윤병인의 중국무술을 보고 한 눈에 매료되었으며 그 후 서로의 무술 기량을 교류하면서 우의를 다졌다.(도야마 간켄도 1924년 타이완에 건너가 타이베이 등지에서 7년간 중국권법을 수련하였다. 아마도 동질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윤병인의 무술 성취도가 매우 좋아서 곧 가라데 4단이 되었고 다니던 일본대학에서 일본인들을 제치고 가라데부 주장을 하였다. 물론 도야마 간켄이 윤병인을 승단시켰으며, 당시 도야마가 5단이었던 점으로 보아 대단히 파격적인 승단(인정)이 아닐 수 없다!(‘태권도현대사’ – 강원식, 이경명 공저 에는 5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에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는데, 도야마 간켄에게 배운 조선인 제자로 김기황(1921 – 1993)과 윤쾌병(1923 – 2005) 등이 있다. 김기황은 윤병인의 대학후배로 같이 수련하면서 윤병인의 무예를 전수받기도 하였고, 대구에서 연무관을 운영하다가 미국(Washington D.C. 지역)으로 이민하여 도장을 운영하면서 제자들을 키웠다.
1945년 일본에서 돌아온 윤병인은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였고, 곧 경동고등학교로 옮겼을 때는 김운용(세계태권도연맹 총재 역임)이 그에게 권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전상섭의 조선연무관에서 잠시 운동을 하다가 1946년 9월1일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YMCA) 에서 권법부를 창설하고 제자들을 지도하였으며, 이것이 후일 이남석과 김순배에 의해 개명된 창무관의 전신이다. 그는 자신이 만주에서 배운 ‘주안파’와 일본에서 수련한 공수도를 혼합한 독특한 무술을 제자들에게 수련시켰다. 즉 각각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체격조건에 맞게 지도하였으며, 지도방법은 많은 말이 없이 기술을 직접 보여주면서 아주 엄격하게 가르쳤다고 제자들은 회고한다. 처음에 YMCA에서 도장 문을 열었을 때는 그의 실력에 매료되어 500명이 넘는 관원들이 모였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정통무도의 엄격함에 견디지 못하고 많은 관원들이 떨어져 나가서 3개월 후에는 180여명이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극기로서 수련한 남은 제자들은 그들이 달성한 무도의 경지뿐만 아니라 후일 우리나라의 태권도를 세계적으로 뿌리내리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6.25 와중에서 창시자 윤병인이 납북되면서130)  YMCA권법부는 혼란속에서 갈등을 빗다가 이남석과 김순배를 중심으로 창무관彰武館을 창설하였고, 홍정표와 박철희를 주축으로 한 강덕원講德院을 창설하면서 건설적으로 분열되었다.

129) 무카스(MOOKAS)에서 재인용, www.kimsookarate.com 참조

130) 윤병인의 맏형 윤병두는 북한의용군으로(1946 – 1950) 있다가 1950년 8월 유병인에게 나타나 월북을 종용했는데, 어떠한 연유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제자인 김주호, 이동주와 함께)을 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개인면담을 통해 남과 북의 선택권이 주어질때 윤병인은 북으로 갔다. 그는1983년 4월 3일 폐암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무리하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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