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기사 살리기
보스톤코리아  2015-03-23, 11:32:36 
현대 미국 정권 중 언론의 자유에 가장 자주, 심각하게 간섭한 것으로 평가되는 조지부시 전 대통령 정부. 하지만 한국의 업계관행과 비교할때는 오히려, 매우 신사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존중하며 타협을 하려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이는, 합리적으로 사안을 저울질 할줄 아는 기자들의 전문성과 외압에 맞서 꼿꼿한 기자정신을 지키고자 하는 보도국 전체의 양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바튼 겔먼은 '특종자판기'로 불리우는 간판 탐사보도 기자다. 그의 경험담은 미국의 주류언론이 어떻게 정부의 외압에 대응하고, 타협할 것은 타협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1) 자체 판단...
바튼은 걸프전이 한창이던 1991년, 연합군 총사령관 스와츠코프 장군이 갑자기 매일 파괴하는 이라크 군의 장갑차 수가 10배 이상 늘었다고 브리핑을 하는 것을 보고 취재에 나선다. 아파치 헬기 조종사들에게 사츠마와리 스타일로 취재를 한 끝에, 그는대전차 공격 헬기 조종사들이 놀라운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달았다는 걸 알아낸다. 헬기 조종사들은 보통 적외선 카메라로 주변 지형보다 뜨거운 곳을 장갑차가 숨어 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공격했었는데, 장갑차의 철판 장갑이 밤에는 사막의 모래보다 급격히 빨리 식는다는 점을 알아낸 뒤에는 밤에만 출격해, 적외선 카메라의 파란점만 찾아 요격해댄 것이다. 바튼은 이 사실을 보도할 경우, 적군을 이롭게 할 것이라 판단해 자체적으로 기사를 죽인다 (미국에서도 'kill'이라는 표현을 쓴다).

2) 협상 (거부)
2002년 바튼의 동료기자는, 9/11 테러 직후 부시대통령이 구소련과의 핵전쟁에 대비해 만들었던 COG/COOP (Continuity of Government, Continuity of Operations) 작전을 부활시켜, 국가 안보에 꼭 필요한 상급 간부(보통 장관급)들을 지하벙커로 보내 '그림자정부(shadow government)'를 꾸렸다는 사실을 취재한다. 화들짝 놀란 당시 대통령 비서실상 앤드류 카드는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알카에다의 사기만 진작시키고 미국의 위상을 떨어뜨릴 수 있다"라며 보도하지 말것을 요구한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아리송해진 보도국장은 바튼에게 자문을 구하고, 바튼은 앤드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국익에 실질적 피해가 간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며, 기사를 죽이라는 요구를 일축한다.

3) 협상 (수락)
바튼은 비슷한 시기 알케에다가 미국의 추적망을 어떻게 피하고 있는지 미국 CIA가 파악한 전체적인 수법에 대한 자료를 입수한다. 이번에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직접 나서서 애원한다. "당신들 취재력 한번 끝내준다. 하지만 결코, 결단코 국익을 위해 보도를 하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라이스의 수시간에 걸친 설명을 들은 뒤, 바튼은 왜 기사내용이 미국의 국익에 저해되는지에 대해 이유가 충분히 소명됐다고 판단해 보도를 포기한다.
4) 승리
바튼처럼 베테랑은 아니지만, 수완이 좋은 같은 보도국의 여기자 프리스트는 그야말로 월척을 건진다. 부시 정부가 해외에서 해당국가의 법에 저촉되는 비밀 테러리스트 용의자 수감 시설들을 운영해왔다는 특종을 취재한 것. 체념한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국장을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로 초대한다. 그리고 해당국가가 기사때문에 테러의 타겟이 되거나, 대테러 연합전선에서 이탈하지 않게끔만 도와달라는 두루뭉실한 조건만 내건다.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진과 프리스트는 제안을 받아들여 해당국가들의 이름만 기사에서 지운 뒤 보도한다. 대통령의 저자세에도 불구하고 보도를 강행한 이유는 불법 해외 수감시설이 미국의 법과 가치에 위반되니, 보도해 시정할 점을 시정하는 것이, 기사를 죽이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사는 프리스트와 워싱턴 포스트에게 퓰리처상의 영광을 선사한다.

기자생활 근 십년간 원인을 잘 알 수 없게 죽어간 기사들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사실 이런 관행은 어느 언론사 할 것 없이 똑같았다. 왜 기사를 죽여야하고 왜 기사를 포기할 수 없는지 공개적으로 소상하게 설명하는 것은 언론 자유를 보호해야할 정부의 의무이며, 보도국 안에서는 그 자체로 어린 기자들에게 훌륭한 기자로 성장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밝힌 한국의 언론자유도 랭킹은 올해 세계 60위. 하지만 8년전 성질이 다른 정권에서 31위를 했을 때에도, 음침한 곳에서 기사가 죽는 관행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부와 언론, 두 주체 모두 바뀌어야,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언론의 자유'는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회에 미국의 케이스를 소재로 언정계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합리적인 소통, 타협의 문화를 만들어봄이 어떠한가?

김형주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플래그십 프로그램, 
공공정책학(Master of Public Policy) 과정에 수학중.
한국에서 방송기자로 9년.
잠시 유엔 한국 대사관에서 임시 공보관으로 근무.
언론과 정치, 경제 영역의 접점에서 진정한 리더십의 의미를 찾고자 연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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