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정책과 조선총독의 고려대장경 간행 (2) |
보스톤코리아 2014-11-03, 15:00:23 |
2014-06-27 데라우찌 총독은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일본으로부터 학자를 불러들여 가지고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의 각판을 조사시킨 다음 결판과 훼손된 것을 보각하여 전장경을 인출케했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해인사에 고려이래로 대장경 각판이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란다. 그런데 총독으로 행정을 집행한지도 얼마 안되었고 또 한국사람의 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때에 그것도 한국사람으로부터 거둔 막대한 예산을 가지고 8만1천여판이나 되는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급히 인출한 소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마침 데라우찌총독 때에 인출한 고려대장경 한부가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규장각도서중에 포함되어 있다. 대호지 (大好紙)에 인쇄하여 청색표지로 장정한 한장본(韓裝本) 1160 책이다. 불교 경전인 대장경이 감히 왕조의도서관인 규장각 도서에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표지 뒷면에 보니< 1919년 12월 26일 사내정의 기증본(寺內正 寄贈本)> 이라고 적혀있다. 델라우찌가 죽은 후에 조선총독부에 기증한 것이란다. 나는 이 고려대장경을 조사하여 그 목록을 작성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데라우찌가 무슨 목적에서 고려대장경을 인출했을까 이다. 데라우찌는 한일합방후 1911년 부터 1916년까지 5년간 조선총독을 지낸 일본의장군으로 한국에 최초로 식민지정치를 시행한 조슈( 長州) 군벌의 무단파이다. 그는 조선총독으로 있다가 1916년 9월 일본의 오구마 (大遇) 내각이 중국정책에 실패하여 총사퇴하자 그 후임 내각의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19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려대장경은 데라우찌가 죽은 후에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은 데라우찌의 유언에따라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조선총독부의 예산을 가지고 인출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정부에서 돌려보내준 것인지 분명치가 않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본이 세계 제1차대전중인 1917년경 <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간행한 일이다. 그< 신수대장경> 은 데라우찌총독 때 인출한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하였다는 < 대정신수대장경> 은 그 원본인 고려대장경에 하등의 추가나 수정을 가한 흔적도 없는것 같은데 <산수대장경>이라고 하였을뿐 아니라 일본 왕의 칭호인 대정을(大正)을 권두서명같이 하여 흠정관으로 간행한 사실이다. 일본이 왜 제1차 세계대전시에 <대정신수 대장경 >이라는 불교경전을 발간했는가라는 질문이다. 아무래도 그 해답은 제1차세계대전의 전후 사정을 살펴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1914년 9월 폴란드 문제로 유럽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일본은 세계대전을 신풍이 (神風)이 불어왔다고 환희했다. 전쟁경기가 도래했다는 말이다 갑오경장때 주한공사를 지낸 “ 이노우에 가오루”는 원로 야마가다 아리모도에게 서한을 보내 전하기를 금번의 세계대전은 일본의 국운 발전에 있어서 천우의복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거국일치로 천우신조에 힘입어 일본의 이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은 영국이 마다하는데도 불구하고 1915년 1월 중국의 산동성에 침입하여 독일의 조차한 청도를 점령하고 중국정부에 대하여 산동성과 만주 그리고 몽고에 있어서의 이권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정부 내에 정치 경제 군사등의 고문단으로 일본인의 등용을 요구하는 21개의 요구조건을 제출하여 그 승인을 강요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5년)에서 형편없이 폐배한 중국을 이제 얕보고 침략의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리가 만무했다. 중국에서 일본의 불법과 침략적인 요구를 반대하는 반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오.사 (五.四) 운동이다. 인본이 중국정부에 제출한 2ㅣ개조의 요구조건은 상식에도 벗어난 불법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이 세계적으로 폭로되어 국제사회의 비난이 높았다. 대 중국정책에 실패한 일본의 오구마 (大遇)내각은 그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게되었다. 중국은 물론 각국의 비난과 원로회의 신임을 받지 못하여 결국 오구마내각은 1916년 총사퇴 하고 말았다. 오구마내각이 물러나자 데라우찌 조선총독이 그 후임 내각의 총리대신에 올랐다. 데라우찌총리는 조슈군벌의 무단파로 일본정계에서도 그의 수상직을 불행하게 생각했다. 그가 수상직에 오른다음 해이다. 러시아에서 1917년 11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력으로는 10월이라 10월 혁명이라고 한다 레닌의 지도하에 행한 볼쉬바키 혁명이 성공하여 러시아에 소비에트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세계최초로 공산주의정부가 러시아에 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정부가 탄생하자 세계가 조용할 수 없었다. 연합국은 레닌의 공산주의 정부를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의 데라우찌총리는 러시아의 혁명을 기회로 1918년1월 시베리아에 출병했다. 데라우찌가 시베리아에 출병한것은 반혁명세력을 도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에 공화국을 세워 러시아와 완충지대를 만든 다음 그 괘래정부를 일본의 지배하에 두고 시배리아의 자원과 사하린의 유전을 독점하겠다는 야심에서 한 것이라고 한다.그런데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을 미국이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철병요구를 무시하고 계속 연해주에 버티고 있다가 7백명의손실과 10억딸라의 전비만 잃고 말았다. 1914년 유럽에서 시발하였던 제1차섹계대전 이 1918년 8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그리고 레닌의 소비에트정부의 수립으로 시베리아출병은 이제 별볼일 없게 되었다. 데라우찌의 무모한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한 일본정계가 불안해했고 또 그로 인한 양곡가격의 폭등으로 민중이 소동을 일으키자 데라우찌 내각은 1918년 9월 총사퇴하고 말았다. 데라우찌는 총리를 사퇴한 다음해인 1919년에 사망했다. 무슨일로 해서 사망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데라우찌 총독이 고려대장경을 처음 인출한 것은 그가 조선총독으로 있을 때이다. 그리고 일본이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대정신수대장경>을 간행한 것은 데라우찌가 일본의 총리대신으로 제1차세계대전의 수습과 함께 시베리아 출병을 행한 때이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때 그의 대장경의 인출과,간행은 불교신앙의 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고 불력의 혜택을 입어 식민지통치의 성취와 일본의 국력을 세계에 신장해 보려는 야심에서 행한 것이라고 하겠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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