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조, "중국·인도계의 관중은 99% 중국·인도인, 내 관중은 98%가 백인" |
시민협회, 보스톤 코미디나잇 매진 대성황, 관중은 98%가 한인 미국 한국계 코미디언의 선구자, 유일하게 쉬는 주간에 보스톤 공연 인턴 장학금 모금 위한 행사, 보스톤 출신 헬렌 홍, 미카일라 캠벨도 참여 |
?????? 2025-10-02, 16:42:53 |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장명술 기자 = 한국계 코미디언으로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며 큰 성공을 이끌어 낸 헨리 조(62)가 보스톤에 왔다. 한국계 코미디언 헨리조를 이 작은(?) 보스톤에서 보게 될 줄은 지금껏 생각치 못했다. 이곳 한인들에게 보스톤은 늘 뉴욕시와 견주는 커다란 전통의 도시나, 인구적인 관점에서는 약 70만에 못미치는 작은 도시다. 한인 인구도 뉴잉글랜드까지 끌어모으면 겨우 4-5만 정도 될 정도다. 보스톤과 연고가 없는 헨리조가 이곳을, 그것도 한인단체 시민협회(KACL)가 개최한 코미디 나잇에 참여하게 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9월 25일 보스톤 인접 도시인 서머빌(Sormerville)의 아츠 앳 디 아머리에서 개최된 시민협회(KACL) 코미디나잇은 시민참여 인턴 장학금 모금을 위한 무대였다. 한 참가자는 코미디나잇이 이렇게 성공적일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매진을 기록한 행사였다. 이날 행사에는 브루클라인 출신 한국계 코미디언 헬렌 홍(Helen Hong)도 무대에 올랐으며, 헐리우드에 진출한 방송인 미카일라 수니 캠벨도 참여했다. 헨리 조는 시민협회 행사까지 끝난 후 9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무대에 다시 올라 관객들과 악수와 환담을 나누고 함께 사진 포즈를 취했다. 자신의 쇼 시간에만 프로가 아니었다. 쇼가 끝난 후에도 찾아 준 관객들과 끝까지 함께하는 프로패셔널의 자세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행사가 끝난 후 행사장 지하로 자리를 옮겨 헨리조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보스톤에서 한인관중을 대상으로 코미디쇼를 진행하게 된 과정이 가장 궁금했다. 헨리 조는 시민협회의 린다 챔피언 회장이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코미디쇼를 개최하고 싶다고 접촉해왔다고 밝혔다. 그의 에이전트는 당초 부정적이었다. 보스톤 시민협회의 행사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으며 청중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또한 헨리 조는 특정 장소에서만 공연한다는 점도 고려해 공연에 반대했다. 린다 챔피언 시민협회 회장은 “KACL이 사상 처음으로 한인 코미디나잇을 계획했을 때 한인 최초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헨리 조를 반드시 초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에이전트에 접촉했고 약간의 협상 끝에 출연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 코미디언은 2020세상을 떠난 고 자니 윤이었지만 현역 코미디언 중에서는 최초이다. 헨리 조는 “이번 공연에 온 유일한 이유는 한국계 커뮤니티를 위한 행사였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노동절에서 땡스기빙까지 모두 스케줄이 있으며 지난 주말이 유일하게 쉬는 주간이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보스톤에 온 것이었다. 이 특별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상당한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한 것이다. ![]() 헨리 조는 “만약 이 행사가 다른 어떤 단체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 단체의 예산이 얼마이든 상관없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헨리조는 한인사회와 많은 단절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소수민족 코미디언은 모두 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데 반해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중국과 인도 그리고 흑인 코미디언은 관객의 99%가 자신의 출신 인종의 관중들인데 자신의 관객은 98%가 백인”이라고 털어놨다. 그의 말에는 서운함이 깊게 베어 있었다. 그는 미국 연예계에서 여러 최초 기록을 세운 선구자였다. 그는 미국 투나잇 쇼에 출연한 첫번째 한국계 미국인, 시트콤 디자이닝 위먼(Designing Women)에 출연한 첫번째 한국계, 프라에디나잇비디오를 2년간 진행한 첫번째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더구나 미국 컨트리음악계에게 가장 권위있는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의 유일한 아시안 멤버다. 선구자의 길은 항상 척박하다. 이러한 업적에도 한인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40년 전 출발 당시 금기시되어 있던 코미디언을 선택한 그에게 실망감을 표출하기에 바빴다. 일부 친척들, 특히 그의 고모들은 그와 이야기조차하지 않았다. 언어적인 장벽으로 인해 한인들이 그의 코미디 무대를 찾지 않았던 것도 상처가 됐다. 테네시 녹스빌에서 자랄 때 유일한 아시안이었던 그는 백인사회에 완전히 동화됐다. 일부는 그를 ‘바나나’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보스톤의 한인사회에서 들어온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한인임을 늘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사학위가 두개였던 과학자 헨리 조의 아버지는 좋은 머리를 코미디에 쓴다며 “낭비”라고 당초 반대하셨지만 이후 아들의 코미디 여정을 열렬히 지지했다. ![]() 헨리 조는 “한인사회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곳에 참여하겠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일부 한인사회 특히 헨리 조의 친구였던 ‘코리안 맨’의 편집장은 한번도 헨리 조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인사회, 한미우호협회는 2020년 헨리 조에게 ‘뉴 어메리칸 히어로 어워즈’를 수여했다. “가족을 주제로 한 건전한 주제의 코미디로 아시안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전국 커뮤니티와 단체를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펴왔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이제는 한인사회도 미국사회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공헌과 업적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때가 된 것이다. 테네시대학에 다니던 대학시절 코미디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계기로 바로 대형 코미디 클럽사에 스카우트 된 헨리 조는 대학을 중퇴하고 코미디언의 길을 걷게 됐다. 얼마되지 않아 그는 성공의 가도를 달리게 됐다. 성공의 비결에 대해서 그는 노력이라고 답했다. “성공하기 위해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어디든 가능한 모든 곳에서 쇼를 진행했다. 잘되는 것은 무대에 서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떤 무대이든 그곳에 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조크를 쓰고 다듬어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는 것은 신이 주신 재능”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특히 성적인 농담이나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는 깔끔한 유머를 전하는 코미디언으로 유명하다. 패밀리서치 블로그에 따르면 헨리조는 “그만의 독특한 가족 유산을 바탕으로 코미디 무대를 준비한다. 그는 또한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하는 가족 생활에서도 코미디 아이디어를 얻는다. 가족 중심의 유머와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는 독특한 감성으로 그는 미국 전역의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내 에이미 조와의 사이에 세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는 아이들이 자랄 때 늘 아이들과 함께한 헌신적인 아버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보스톤의 관객들에 대해 묻자 헨리 조는 “좋았다”라고만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서머빌의 아츠 앳 디 아머리를 가득 메운 한인 관객들의 환호는 그에게 색다른 ‘보스톤 경험’이었음이 틀림없다. 헨리 조에게는 98% 한국 관객을 만나는 자리였고, 한인들은 코미디의 선구자인 스타 헨리 조를 만나는 특별한 자리였다. 의미있는 장학금도 모였다. 코미디나잇을 결코 웃어 넘겨서는 안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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