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연재] 피트니스와 고등학생
페이지 정보
작성자 June Lee 칼럼니스트 작성일본문
학교에 다녀온 딸이 헬로 말고 내게 먼저 다른 말을 건네는 날은 드물다. 어제가 바로 그 드문 나날 중에 하나였는데 나난이가 나한테 인사만 하고 방으로 곧장 들어가 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 뻔했다. 현관문 앞에 책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서서 동네 프랜차이즈 피트니스 센터에서 6월부터 8월까지 고등학생들에게 무료 멤버십을 준다며 나난이는 빠른 속도로 무수한 말을 쉬지 않고 이어나갔다. 다종다양한 아령의 존재, 근육의 중요성, 정신 건강과 운동의 관계.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더러 자신과 친구를 피트니스 센터까지 차로 모시고 다니라는 거였다. 나난이가 말을 꺼낸 순간부터 이건 내게 하는 부탁 아닌 명령. 언제라도 딸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일에 선뜻 알았다는 대답이 안 나오는 건 목숨은 단 한 번만 바치면 되는데 운전은 여름 내내 몇 번이고 되풀이될 테니까.
플라넷 피트니스로 가는 길 나난이는 조수석에 앉아 몸을 돌려 뒷자리에 앉은 친구와 내내 떠들었다. 두 고등학생은 요즘 인기 있는 유튜브 쇼츠로부터 시작해 학교 점심 메뉴, 라마단 금식 규칙, 예수님과 하나님, 로미오와 줄리엣, 임신과 출산, 이 전부를 블랙 유머와 깊이 있는 통찰로 아울렀다. 차가 빨간불 앞에 섰을 때 나난이 친구는 혼잣말하듯 사람을 사물에 비유하는 풍조가 왜 생겨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람한테 인형 같단 말을 찬사로만 볼 수 있냐고도 덧붙였다. 딸 친구 앞에서 인상적인 헛소리나 할 바엔 말을 아끼는 게 나아 나는 잠시 뒤돌아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피트니스 센터 입구에 차를 대고 애들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출입문을 통해 오고 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주로 사람들의 옷차림, 문신, 물통, 운동화를 눈여겨보았다. 나난이와 친구는 올여름 이 경험으로 어디서나 저런 무늬와 물건을 볼 때마다 편안하고 환영받는 느낌을 받게 될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대도 한 공간에서 비슷한 활동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겉모습이 어떤 물건을 먼저 소유함으로써 서로 닮아가는지 일단 나난이한테 물통부터 하나 새로 사줘야겠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기사 [인류연재] 트레이더 조와 입국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나난이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본다. 차에 타자마자 나난이는 생애 첫 피트니스 운동 소감을 묻지도 않았는데 소상히 밝혔다. “엄마, 내 옆에서 움직이는 계단 타던 아저씨 오 마이갓 계속 방귀 뀌었어. 자기가 헤드폰 쓰고 있으니까 소리 안나는 줄 알았나 봐. 냄새 내가 다 맡고”. 깔깔 웃는 내게로 땀냄새가 사방에서 끼쳐와 차창을 조금 내렸다.
이혜준(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