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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연재] 다문화와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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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스톤 작성일 26-03-0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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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

- 문보영,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나를 경계로 안팎의 언어가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러기로 한 순간부터 스스로 이해할 말과 타인에게 이해받을 말 사이 그 어색한 시차를 매번 바로 잡진 않았다. 대신 상대방에게 재빨리 아무 대답이나 해버리거나, 오해 섞인 시선을 외면하며 침묵하기를 일삼았다. 이런 식으로 서투른 외국어에 무한히 빚진 사람처럼 굽신대는 마음에만 나날이 유창해졌다. 그러나 언제라도 마음 내키면 내키는 대로 이곳을 떠날 순 없으므로 나는 다시 평일 오전 ESOL 수업을 찾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날짜가 파랗게 적힌 화이트보드 앞에서 선생님은 우리에게 음력설에 대해 얘길 나누라고 했다. 교실 창가 주변에 고루 퍼져 책상을 맞대고 앉은 이민자 사이에서 과연 누가 먼저 입을 뗄 것인가. 서로 눈치만 살피는 이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우릴 간지럼 태울 듯이 교실 안을 맴돈다. 그 사이 할 말이 떠오른 내가 목소리를 낸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엄마랑 이모, 숙모, 큰엄마, 작은엄마가 온 식구 먹일 음식 하느라 부엌에서 하루 종일 고생 많이 한 것 같아요” 


나를 이룬 그 여성들에게 결코 가닿지 않을 이 고백은 축 처진 목소리로 한국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외국인들에게 전해진다. 나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중국 아저씨가 내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고갤 끄덕인다. 경청하는 그 몸짓을 따라 그가 아직 걸치고 있는 겨울 외투가 바스락거린다. 나프탈렌향이 훅 끼친다. 더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 나는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건넨다. 왜냐하면 이제 당신 차례니까요.


음력설에 중국에선 빨간 봉투에다 돈을 넣어 애들한테 선물한다고 그가 말한다. 영어로 말하는 그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자니 강아지가 짖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같다. 우아한 음으로 목구멍을 통과시키기엔 이 공간과 시간을 압도할 쓰나미와 같은 마음을 지닌 그의 의욕적인 발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무슨 퀴즈 맞추는 사람처럼 다음 이어질 말을 짐작해 외쳐버린다. 이런 내 모습도 왁왁 짖는 개 같을 거라 우린 서로의 말을 두 번 세 번 캐묻지 않고 한 번에 알아듣는다.


여기서 그 어느 명절도 지난 세월 속 내가 보낸 명절과 같이 집안 누군가의 수고나 나의 수고로 채우지 않는다. 뜻하지 않게 불공평한 화목에서 비켜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 여성들의 애정 어린 손맛에서 멀어진 탓에 때마다 입맛이 쓰다. 뒤늦게 아이와 어른의 시점 모두에서, 혹은 외부인의 시각으로 한국 명절 분위기를 되돌아보며 시름에 잠겨 있을 동안 내 앞에 앉은 밀레니얼 러시안이 선언한다. 


“난 내가 아는 이 세상 모든 기념일을 기념해”


아니, 그러면 얘 오늘 중국 아저씨한테 세뱃돈 좀 받아야겠는데요, 는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머리를 쓴다. 어느새 책을 펼치라는 선생님 목소리에 당장 고민을 접는다. 



이혜준(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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