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과 용서 사이, 건강한 거리!!
신영의 세상 스케치 10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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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스톤 작성일 26-08-24 18:20본문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 22:3)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이런 질문을 한다. “이 사람과 계속 관계를 이어가야 할까?”, “그냥 손절하는 것이 나을까?”,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다시 가까워져야 할까?”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이 질문은 더욱 어려워진다. 기독교인은 “용서하라”는 말씀 앞에서 때로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누른다. 상담을 받는 사람도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까?”하며 자신의 상처를 의심한다. 그러나 용서와 관계의 회복은 같은 것이 아니다.
손절이 답일 때가 있다. 어떤 관계는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처가 된다. 나의 경계를 반복해서 무시하고, 거짓말과 조종을 반복하며, 나를 이용하거나 모욕하고, 사과하면서도 같은 행동을 계속한다면 관계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가까이해야 할 의무가 없다. 사랑은 무경계가 아니다. 건강한 사랑에는 경계가 있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건강한 관계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갈등이 손절의 이유는 아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나도 실수하고 상대도 실수한다. 때로는 서로의 말이 다르게 전달되고, 기대가 어긋나고, 감정이 격해져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곧바로 관계를 끊기보다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이 나를 계속해서 해치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번에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인가?”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한 번의 실수와 반복적인 패턴은 다르다.
용서한다고 다시 가까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친다. 그러나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한 일이 옳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일에 내 마음을 계속 붙잡아 두지는 않겠습니다”라는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용서하면서도 거리를 둘 수 있다. 기도하면서도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 축복하면서도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미움이 아니라 ‘건강한 경계’일 수 있다.
손절과 용서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우리는 관계를 두 가지로만 생각하기 쉽다. 가까이 지내거나, 완전히 끊거나. 하지만 실제 삶에는 그 사이가 있다. 연락을 조금 줄일 수도 있다. 필요한 만남만 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건강한 거리‘이다. 거리는 미움이 아니다. 때로는 관계를 완전히 끝내지 않으면서도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지혜이다.
건강한 거리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관계에서 상처를 받으면 우리는 상대방만 바라본다. “저 사람이 왜 저랬을까?”, “저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대할까?” 그러나 치유를 위해서는 질문을 하나 더 해야 한다. “나는 왜 이 관계에서 계속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가?”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 몫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경계선은 상대를 벌주는 선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선이다.
상대방의 말보다 행동의 변화를 봐야한다. “미안해”라는 말보다 그 이후의 행동이 중요하다. 진정한 관계의 회복은 말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동의 변화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손절’이 아니라 ‘내 마음의 방향’이다. 누군가를 끊어내면서도 마음속에서 계속 그 사람을 미워한다면, 관계는 끊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사람에게 묶여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용서하고 거리를 두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아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치유’의 과정일 수 있다. 할렐루야!!
시인 신영은 월간[문학21]로 등단,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칼럼니스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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