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톤코리아 칼럼 -인류연재] 삽질과 겸손
페이지 정보
작성자 June Lee 칼럼니스트 작성일본문
눈보라가 휘몰아칠 거라는 일기예보에 아침 일찍 장을 보러 트레이더 조로 차를 몰았다. 평소와 달리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식료품점에서 이번 일기예보의 기세를 체감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는 카트 안을 곁눈질하며 선반 위에 진열된 빵과 물을 카트에 옮겨 담았다. 그렇게 내 주위 모든 방향에서 사람 손을 타고 식료품이 분주히 오르내리는 모습이 내 불안을 더했다. 최악의 사태를 예상해 최선으로 대비하는 사람들이 내뿜는 묘한 기운 속에서 서로 갈 길을 내주며 가다 서다 공들여 장을 보았다. 이 같은 상황과 행동으로부터 피치 못할 소속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우리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일단 먹고살아야 한다는 비장한 구호가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듯도 했다.
드디어 쉴 새 없이 눈이 내린다. 온 세상 소음과 색채가 시리게 옷을 갈아입는다. 달갑지 않은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도 간절했던 모양인지 월요일은 휴교라는 애들 학교 이메일에 마음이 놓인다. 커피를 내려마시면서 함박눈이 공중에다 무작위로 점을 찍는 창 밖을 내다본다. 아름다운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만 보는 사람은 그 풍경 곁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는 우아한 운명. 나는 그런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으므로 눈발이 잦아든 틈을 타 홀린 듯이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는다. 부츠를 찾아 신고 현관문을 연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위로 발자국을 새긴다.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이 세상에 내 체온을 선보인다. 감히 인간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기후 아래 내 키만 한 삽을 두 손으로 치켜든다.
폭설이 그친 이후 남편과 함께 본격적으로 며칠에 걸쳐 영영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은 삽질을 했다. 한 삽씩 눈을 퍼다 드라이브웨이 주변을 볼품없는 얼음산맥으로 둘렀다. 한겨울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게 하는 이 끈질긴 삽질에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일단 온몸이 다 쑤시니까 몸에 통증 없는 일상으로 제발 돌아가고 싶도록 한 점. 쌓인 눈 속을 파고 드는 삽날이 거인 팥빙수 떠먹는 소릴 내면서 우리한테 신경질적으로 근면과 성실을 요구한다고 착각하게 만든 점. 제설기 없고 제설차를 부르지 않는 우리의 애매한 체력과 재력을 분석하려다 포기하게 한 점. 결국 단순하게 이제부터 장 볼 때 돈 좀 아껴 써야 하나 잠시 반성해보게 되고 말이다. 하지만 삽질 뒤의 폭식이야말로 살 맛나는 노동이다. ‘삽질’ 좋아.
이혜준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