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20) |
보스톤코리아 2024-03-18, 11:29:04 |
579년 진평왕이 즉위하였다. 조모 사도태후에 의해 12살의 어린 김백정은 갑자기 왕이 되었다. 사도가 섭정을 하였고 미실과 보명이 좌우후가 되어 색도를 하였다. 미실은 왕궁에서 살지 않고 영흥사永興寺로 거처를 옮겼다. 영흥사는 법흥왕의 왕후 보도부인保道夫人이 건립한 사찰인데, 진흥왕의 왕후인 사도왕후도 만년에 동 사찰에서 여승으로 머물렀다. 그런데 보도왕후는 만년에 들어가 여승이 된 것이 아니라, 화랑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딸 지소(진흥왕의 모후)를 출산 후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되자 어느 무렵 강제로 출궁 당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제21대 비처왕(소지왕)의 딸로 태어난 보도保道공주는 김원종(후에 법흥왕)과 결혼하여 태자비가 되었지만 총애를 받지 못했다. 보도에게는 이부동복의 아우 오도吾道가 있었다. 오도는 선혜왕후(비처왕의 왕후)와 중僧 묘심이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이들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금갑의 주인공들이다). 오도는 매우 아름다워 태자 원종으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오도는 태자보다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위풍당당한 풍모에 반해 그를 흠모하며 따르다가 딸 옥진과 금진을 낳았다. 그러자 원종태자는 오도를 아시공(원종의 딸 삼엽공주의 남편)에게 후처로 삼게했고, 사통하는 관계였던 벽화(그들은 삼엽을 낳았다)는 비량에게로 하가下嫁시켰다. 그리고 나서 마음을 돌려 조강지처인 보도부인를 가까이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화랑(과 오도)의 딸 옥진이 아름답게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옥진을 좋아하게 되었다. 박영실과 옥진이 결혼식하는 날, 법흥왕은 친히 참석하여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옥진의 미모에 빠진 왕은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고, 영실에게는 자신의 딸 지소와 맺어주었다.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록된 옥진과의 사랑에 빠진 법흥왕은 왕후 보도부인에게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게 하였다. 이때 지은 절이 영흥사이다. 많은 왕후와 태후, 후궁들이 이 사찰에서 여승이 되었으니 영흥사는 단연코 왕실의 원당願堂이다. 영흥사는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는 경주공업고등학교(경주시 사정동)가 들어서 있는데 건물을 세우면서 많은 석조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찰의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과 석탑의 몸돌, 지붕돌 등 다양한 석조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영흥사는 경주의 칠처가람七處伽藍476) 중의 하나인 유명한 사찰이었다. 미실이 거처를 영흥사로 정하자, 그의 심복이자 정인인 설화랑은 경호의 총책임자(사신두상私臣頭上)가 되어 죽는 날까지 변치않고 곁에 있었다. 미실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한 자는 설화랑이고, 세종에게 시종일관 충성한 자는 문노였다. 606년 봄 어느날, 미실이 괴질에 걸렸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었다. 이에 설화랑은 주야로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의 기도를 ‘부처님’이 들어 주었을까? 마침내 설화랑은 같은 괴질을 앓았고 곧 미실은 병석에서 일어났다. 설화랑은 (미실을 대신하여?, 전염병으로 추측된다) 얻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606년 7월에 사망하였다. 미실은 슬피 울며 자신의 속곳을 함께 넣어 장사 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 라고 하며 정인을 먼저 보냈다. 미실은 남편 세종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정인이 있었지만 설화랑을 가장 사랑하였다. 그들이 580년에 낳은 막내 아들 설보종은 미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다. 설보종은 616년 16세 풍월주에 올라 화랑도를 이끌었다. 476) 칠처가람七處伽藍이란 월성에 있었던 7개소의 전불시대前佛時代(석가모니를 비롯한 과거칠불시대, 과거칠불은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이다)의 사찰터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我道는 고구려인인 그의 어머니로부터 신라의 서울에는 전불시대의 일곱 개의 가람터가 있으며, 앞으로 3,000달月이 지나면 성왕聖王이 나와 크게 불교를 일으키게 될 것이니, 그곳에 가서 불교를 전파하라는 당부를 받는다. 그 일곱 곳은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지금의 흥륜사興輪寺), 삼천기三川岐(지금의 영흥사永興寺), 용궁龍宮의 남쪽(지금의 황룡사皇龍寺), 용궁의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 사천沙川의 끝(지금의 영묘사靈妙寺), 신유림神遊林(지금의 천왕사天王寺), 서청전(지금의 담엄사曇嚴寺, 담암사라고도 한다)이다(삼국유사의 흥법 제3 아도기라조와 탑상 제4 가섭불연좌석조 참조). 삼국유사에 나오는 아도에 관한 기록을 조금 더 보면, 그는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하여 16세 때 위魏나라로 가서 아버지 굴마堀摩를 찾아 뵙고, 19세 때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 어머니 고도녕高道寧의 명을 받들어 263년(미추왕2년)에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3년 동안 일선현一善縣(현 경상북도 선산)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있다가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준 공으로 불교 전도의 허락을 받고 흥륜사興輪寺를 지었다. 미추왕 사후 국인들의 미움으로 다시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 살다가 죽었다(아도와 행적이 유사한 묵호자墨胡子와 동일인인지는 불명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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