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14) |
보스톤코리아 2024-02-05, 11:37:33 |
576년8월, 제24대 진흥왕이 사망하였다. 왕실의 공기는 곧 예측할 수 없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왕이 병마로 인하여 생사를 넘나들고 있을 때, 이미 조정의 내정은 사도왕후와 미실이 잡고 있었고, 외정은 세종과 설원, 미생 등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금륜태자에게는 왕의 죽음을 비밀로 했다. 사도왕후는 모든 통제권을 장악하고 나서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미실과 태자를 상통하게 한 후 약속을 받고나서야 둘째 아들 금륜태자를 왕위에 올렸다. 그가 제25대 진지왕이다. 그 약속은 다름아닌 미실을 왕후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금륜태자에게는 이미 부인 지도가 있었다. 지도왕후의 부모는 기오공과 흥도낭주인데 기오의 부모는 홍기와 선혜(소지왕의 후)이고, 흥도의 부모는 박영실과 옥진이다. 사도왕후/태후에게는 지도도 자매인 흥도의 딸이고, 미실 역시 자매인 묘도의 딸로 모두 이질姨姪이다. 하지만 사도태후는 미실과 함께 그녀를 따르는 무리들과 정치적 세력을 함께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진지왕(김사륜/금륜)을 통제하였다. 사도태후는 금륜태자를 왕위에 올리기 직전에 뭇 사람들로 부터 중망이 높은 거칠부(황종)를 먼저 상대등으로 삼았다(거칠부를 576년에 상대등으로 삼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법흥왕18년인 531년에 설치된 상대등은 초대 철부哲夫가 534년까지 재위했다. 그리고 532년 가야의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여 상등上等의 자리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상등이 상대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기록이 전혀 없다가 576년에 거칠부가 상대등에 올랐다). 이후 거칠부의 딸 윤궁을 미실/세종 부부의 중매로 세종의 심복인 문노와 혼인시키는 것으로 볼때 거칠부는 사도태후를 중심으로 한 미실일파와 한 배를 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뿐만아니라 거칠부의 또 다른 딸 윤옥允玉은 미실의 동생인 미생의 첩이 되었고, 거칠부의 아들 윤황允荒은 사도태후의 딸인 월륜月輪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이에 더해 세종과 사도는 진흥왕이 병석에 있을 때 서로 상통하였다. 즉 당시의 정치적 동맹은 모두 인맥姻脈과 사통私通이 연결고리가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사도태후와 미실일파에 의해 왕위에 오른 진지왕은 정사政事를 바르게 펼치기 보다는 정사情事에 몰두하였다(그 대표적인 사례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도화녀와 비형량조’ 의 이야기이다). 결국 모후 사도태후는 걱정하며 미실과 함께 폐위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오빠인 노리부弩里夫에게 그 거사를 맡겼고, 노리부는 자신을 따르는 일파인 세종, 설화랑, 미생 등을 동원하여 진지왕을 폐위하였다. 그때가 579년이었고, 아마도 4 ~ 7월(음)이었다. 거사에 성공한 노리부는 상대등에 올랐고, 사도태후는 죽은 동륜태자의 장남 어린 백정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제26대 진평왕이다. 사도태후와 미실이 ‘황음무도’ 한 진지왕을 폐위하려고 할 때, 문노의 세력이 불복할까 염려하여 먼저 태후가 문노의 호국선화랑과 설화랑의 운상인화랑을 통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미실을 원화로 세웠다. 미실은 572년 동륜태자의 ‘개 죽음’ 사건으로 인하여 물러났던 원화의 자리에 진지왕 폐위 거사와 함께 복위하였다. 한동안 두 파로 나누어져 있던 화랑도는 579년 하나로 통합되었고, 심지어 그들은 진지왕 폐위 거사에도 깊숙히 개입하였다. 미실을 원화로 삼은 화랑도는 조직개편에 들어갔다. 6세 풍월주이자 미실의 남편 세종은 상선上仙(전임 풍월주)이 되었고, 문노가 아선亞仙(화랑세기를 통틀어 7세 풍월주 설화랑조에만 등장하는 위位인데 아마도 문노의 일파를 진지왕 폐위 거사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할당한 벼슬인 것 같다), 설화랑과 비보랑469) 을 좌우봉사화랑左右奉事花郞, 미생을 전방봉사화랑前方奉事花郞으로 삼아서 조직의 균형을 잡았다. 당시 문노를 따르던 낭도들 중에는 미천한 가문의 출신들이 다수 있었는데 높은 관직에 발탁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즉 초택(한미한 가문)의 사람들과 투항하고 귀순한 무리는 문노의 휘하에 들어가 (낭도가 되어) 출세하는 길이 열렸기에, 그들은 문노를 신과 같이 받들었다(이 기록으로 보아 화랑도의 적지 않은 낭도들이 한미한 출신들이었고, 일반 백성도 화랑도가 되어 공을 세우면 관등과 관직을 부여 받았음을 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미실은 문노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설화랑과 미생에게 문노를 선도仙道의 스승으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따랐지만, 설원랑을 따르는 운상인파에서는 불평하는 낭도들이 많았다. 그러나 설화랑은 “총주寵主(미실)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라며 무릎을 굽혀 섬겼다. 곧 문노를 따르던 호국선의 낭도들도 설화랑에게 기꺼이 복종했다. 이어서 풍월주의 이취임식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469) 비보랑은 9세 풍월주를 역임하였다. 부모는 비대전군과 실보낭주이다. 비대전군의 부모는 법흥왕과 옥진인데, 법흥왕이 적자가 없어서 비대나 누이의 아들인 박영실에게 차기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었는데, 딸 지소와 삼엽공주,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반대로 왕위는 지소의 아들 삼맥종(진흥왕)에게로 이어졌다. 제25대 왕이 될 뻔한 비보랑, 그의 어머니 실보의 부모는 법흥왕과 삼엽공주이다. 즉 비대와 실보는 동부이복 남매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의견목록 [의견수 : 0] |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 |
|
프리미엄 광고
161 Harvard Avenue, Suite 4D, Allston, MA 02134
Tel. 617-254-4654 | Fax. 617-254-4210 | Email. [email protected]
Copyright(C) 2006-2018 by BostonKorea.com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and Managed by Loopiv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