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11) |
보스톤코리아 2024-01-15, 10:58:37 |
572년3월(진흥왕33년), 태자 동륜이 부왕의 후궁인 보명궁주와 사통을 한지 7일째 되던 날, 홀로 담장을 넘다가 개에게 물려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궁중은 발칵 뒤집혔고, 왕은 자초지종을 밝히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들어나는 실상은 왕을 더욱 격노케하였다. 보명궁주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장 총애하고 있던 미실도 이 사건과 연루되어 있었고, 태자 동륜과 사통한 과거를 알게 되었다(진흥왕이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애송공주는 동륜의 딸이다). 게다가 원화 미실을 보좌하여 화랑도를 이끌던 미생, 설원랑 등 화랑도의 주역들도 모두 동륜과 함께 밤마다 어색을 하다가 결국 동륜태자는 보명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진상을 파악한 진흥왕은 옥사를 크게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사도왕후(미실의 이모)가 ‘피바람’ 을 몰고와 죽은 아들의 혼령을 어지럽히기 보다는 평온하게 그의 명복을 빌자고 간청하였다. 곧 왕은 왕후의 의견에 따랐고, 미실를 비롯한 연관된 낭도들도 모두 용서하고 불문에 부쳤다. 그리고 왕은 사죄하며 물러나는 원화의 직위를 다시 풍월주로 대체하기 위하여 변방에서 국토방위에 여념이 없던 세종을 왕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세종은 아내 미실의 강권으로 풍월주의 위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또한 진흥왕이 미실에게 전주가 되어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며 남편 세종과 장남 하종 그리고 갓난아기 수종전군만 데리고 출궁하여 해궁海宮465) 으로 나가서 기거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태자 동륜의 ‘개 죽음’ 사건으로 총애하는 미실과 헤어지게 된 진흥왕은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 수종이 보고 싶다는 핑계로 미실에게 입궁하라고 명하였지만, 그때마다 미실은 글을 올려 자신의 죄목을 늘어놓고 거절하였다. 결국 진흥왕은 수종이 보고 싶다며 친히 해궁으로 거둥하였다. 왕은 해궁에 도착한 즉시 아들보다는 미실을 먼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미실도 눈물을 흘리며 거듭 사죄하였다. 미실은 왕의 용서와 총애에 감동하여 마침내 왕과 함께 궁궐로 돌아왔다. 왕은 세종에게 병부우령兵部右令466) 의 직을 내려 그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미실에게는 입궁하여 자신을 받들게 하였다. 이 무렵 미실은 세종의 아이를 임신하였으므로 해산을 한 후 입궁하게다고 청하였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미실은 입궁하게 되었고 달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옥종玉宗이다. 진흥왕은 옥종을 마복자摩腹子(한자의 뜻은 ‘배를 맞대어/문질러 낳은 아들’ 이다. 마복자는 임신을 한 여자가 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후 낳은 아들를 말한다. 옥종은 왕자나 전군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았다)로 삼았다. 왕의 미실에 대한 총애는 처음과 같았고, 미실은 자신의 심복들을 모두 끌어 모아서 중요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왕이 모두 허락하였다. 그리고 왕은 사도왕후 궁전 옆에 새로이 궁전을 짓고 미실의 가족(세종, 하종, 애송공주, 반야공주, 난야공주, 수종전군)들이 살게하였다. 이 당시 화랑도는 7세 풍월주 설원랑이 이끌고 있었다. 그의 한미한 출신으로 인하여 낭도들이 처음에는 그를 받들 생각이 없었지만, 미실은 권세로 낭도들을 호령하였고, 설화랑에게는 진귀한 하사품을 많이 주면서 늘 격려하였다. 설화랑은 미실로부터 받은 귀중품으로 심복들을 만들어 갔고, 무엇보다도 미실의 명으로 부제에 임명된 미생(미실의 동생)의 힘이 가장 든든하였다. 설화랑의 부모는 설성과 금진낭주이다. 설성은 설씨녀의 아들로 아버지가 화랑이었다는 것 외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삼국사기 권48, ‘설씨조’의 내용은 화랑세기의 설씨녀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날 구리지(백화후와 비량의 아들, 5세 풍월주이자 미실의 첫 연인이었던 사다함의 아버지)가 어떤 마을에서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30세의 설씨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 설성을 데리고 14년 동안 홀로 살고 있었다. 유화였던 설씨녀는 어느날 화랑도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고, 이튿날 그 낭도는 명을 받아 변방으로 떠나야만 했다. 14년간 기다렸지만 낭도는 돌아오지 않았고,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구리지는 잠시 기롱짓거리를 하자는게 아니라 후처로 삼겠다는 약조를 굳게하고 나서야 설씨녀의 마음을 얻었다. 설성은 어머니와 함께 구리지를 섬기며 살았다. 구리지가 독산성 전투(548년)에서 사망하자 금진은 남편 구리지의 용양신(남색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이었던 설성과 사통하여 설원랑을 낳았다. 설성도 562년 대가야 정벌 때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그래서 설원랑은 늘 출신의 한미함을 곱씹으면서 살아왔다. 465) 해궁의 위치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 바닷가에 있었는지 아니면 왕경 내에 있는 궁전에 큰 연못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세종과 미실이 아들 하종을 위하여 해신에게 기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해신의 존재도 관심의 대상이다. 당시는 왕이나 대영웅들을 신격화하여 신궁에서 신으로 모셨다. 신국神國 신라의 이 해신은 누구를 신격화한 신일까? 466) 병부는 최초로 설치된 신라의 중앙관서로 모든 군사사무를 관장하였다. 수장인 병부령은 대아찬(5등급)에서 태대각간의 관등으로 다른 장관들보다 관위가 높았다. 병부령은 516년(법흥왕3년)에 처음 설치되었고, 544년(진흥왕5년)에 1명이 추가되었으며, 659년(태종무열왕6년)에 다시 1명을 더해 모두 3명이 되었다. 병부령이 설치되고 추가된 시기가 6~7세기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고 삼국을 통일해 나가던 시기와 일치한다. 즉 신라의 대외 팽창과 군사업무의 증가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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