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4. 제로니모와 나바호의 천리 길 (2) |
보스톤코리아 2016-04-25, 11:53:33 |
망가스의 죽음 미군들이 전보다 더 극성스레 아파치족들을 찾아내어서 죽이는 일이 많아짐에 따라 노 추장 망가스는 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군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밀물처럼 몰려오는 백인의 숫자와 가공할 힘을 자랑하는 대포에 맞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돌아가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노 추장은 읽은 것이다. 그러던 참에 미군들이 평화회담을 갖자고 전갈을 보내왔다. 전에도 여러 번 미군들에게 속은 적이 있기 때문에 부하들은 망가스가 가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1863년 1월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혼자서 말을 타고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대로 미군들은 망가스를 포로로 바로 잡아서는 맥린 요새(Fort McLean)로 이송해 버렸다. 그 요새에 있던 웨스트(Joseph West) 장군은 보초병들에게 망가스를 처치해버릴 것을 간접적으로 지시하였고 보초병들은 밤새 못된 고문을 하다가 총살시켜버렸다. 망가스 시체에 대해서는 엽기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머리를 잘라내어 물에 끓여 해골만 추려내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 해골을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박물관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확인된 바는 없다. 이제 배신을 식은 죽 먹듯 해대는 백인에 대한 아파치의 적개심은 극에 달하였다. 아파치 전사들은 닥치는 대로 백인들을 공격하여 약탈하고 살해하였다. 남서부 지역의 백인들은 아파치 공포에 휩싸였다. 1차 아도베 월 전투(First Battle of Adobe Walls) 아파치와 백인 간의 상호 불신은 점점 짙어지고 증오심과 복수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과정에서 산타페 트레일을 지나는 포장마차 행렬을 인디언들이 자주 습격하였다.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정규 군인들은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주로 동부로 차출돼 가는 바람에 서부에서는 인디언과의 전쟁에 자원병부대가 많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백인 측의 전력 약화를 인디언들은 백인에 대한 공격의 호기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에 칼턴은 미군의 전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실력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인디언마을을 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작전 책임자로 킷 카슨 대령(Christopher Carson)을 선택했다. 공격 대상은 텍사스 서북부 캐나디언 강 북쪽 연안의 남부 평원에 있는 아도베 월로 정했다. 아도베 월에는 카이오와(Kiowa), 코만치(Comanche) 그리고 평원 아파치(Plains Apache)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드디어 1864년 11월 10일 기병 260명, 보병 75명 그리고 유트족(Ute)과 히카릴라 아파치(Jicarilla Apache) 출신 용병 72명을 이끌고 카슨은 텍사스 주 바로 너머 뉴멕시코에 있던 배스컴 요새(Fort Bascom)를 출발했다. 두 문의 대형 대포, 27대의 짐마차, 한 대의 구급마차 그리고 15일분의 식량을 함께 가져갔다. 그들은 캐나디언 강 남쪽 길을 따라 동쪽으로 진군해갔다. 때 이른 폭설로 진군 속도가 늦어져 11월 24일에야 아도베 월 서쪽 약 50km 지점에 도착했다. 이 날 오후 미군의 정찰병들이 대규모 인디언 거주지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보고해왔다. 보급품을 실은 마차를 보호하도록 보병을 거기에 남겨두고 기병대와 대포를 이끌고 밤중에 아도베 월로 접근해갔다. 다음날 아침 기병대 1개 중대는 강을 건너 북쪽으로 배치했다. 11월 25일 동튼 지 두어 시간쯤 지난 뒤 176개의 천막(teepee)으로 구성된 코만치 인디언마을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인근에 살던 카이오와 인디언과 평원 아파치족 전사들도 백인들의 공격 소식을 듣고는 코만치 마을로 급히 달려왔다. 카슨은 당초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미군 측의 믿을만한 보고서에 의하면 1200에서 1400명 가량의 전사가 있었던 반면 미군측은 인디언 용병을 합하여도 330명에 불과했다. 전투는 대 혼전에 빠졌는데, 흰곰(White Bear)이라고 불리는 사탄타(Satanta) 카이오와 전투추장은 미군이 이용하는 전투 지휘용 나팔을 일부러 헷갈리게 불어서 혼란을 야기했다고 한다. 약 일곱 시간에 걸친 전투를 치룬 뒤 카슨은 미군의 대포용 포탄과 소총실탄이 거의 소진되어 더 이상 전투 수행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인디언들은 이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마른 풀밭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미군측이 맞불을 놓아서 인디언의 추격을 따돌리고 병참부대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미군측은 일곱 명이 사망하고 약 3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인디언 측에서는 약 60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미군과 인디언은 서로 자기네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카슨이 적절한 타이밍에 퇴각하기로 결정한 일은 칭찬받을 만한 일로 평가되고 있다. 무턱대고 공격을 계속했더라면 미군보다 몇 배나 많은 인디언들한테 크게 패하여 뒷날 리틀 빅혼강 전투에서 전멸을 당한 카스터와 같은 운명에 빠질 뻔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랜트 요새 대학살 약탈과 응징과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아파치족들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미군의 정책에 순응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랜트 요새(Fort Grant)에 근무하고 있는 휘트먼(Royal Emerson Whitman)중위가 인디언들에게 잘해준다는 소문이 퍼져 하나둘씩 평화롭게 살기를 희망하는 피날(Pinal)과 아라바이파(Aravaipa) 아파치족 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요새 인근의 아라바이파 강가에 500명이 거주하는 큰 마을을 이루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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