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06 |
보스톤코리아 2015-11-16, 12:08:46 |
신라인이 쓴 신라의 역사서 화랑세기, 그 필사본이 1989년 공개된 이후 진위의 찬반양론이 계속되어 오고 있다. 박창화가 1933년 이후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 근무할 당시 진본을 보고 베꼈다는 화랑세기의 필사본은 그의 제자에 의해 화랑세기가 김대문에 의해 씌여진지 850년이 더 지난 후 출현하였다. 그리고 후손이 다른 필사본을 1995년에 공개하였다. 즉 1989년 처음 공개된 필사본은 1995년에 공개된 필사본(모본)의 ‘발췌본’이었다. 그리고 2007년에 그 ‘잔본殘本’이 발견됨으로써 진위의 논쟁은 새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07년에 발견된 잔본은 앞서 발견된 두 본의 초고로서 박창화가 집필한 ‘소설류’로 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위서론에 맞서 진서론은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총장도 역임)인 이종욱을 중심으로 주장하고 있다.151) 진서론의 주장도 근거가 있으며 반박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먼저 발췌본과 필사본(모본)을 비교했을 때 발췌본의 완성도가 허술해 박창화가 발췌를 하면서도 화랑세기를 정확히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리고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향가는 박창화가 한학에 능통했지만 그가 멋대로 창작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한편 향가 연구의 권위자인 김완진 교수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향가들이 너무 쉽다고 지적했다. 고어인 신라어의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쉽게 해석이 된다고 보고 있다), 또한 화랑세기에 나오는 성적性的인 내용이 유교관념에서 보았을 때 윤리에 어긋난다고 위서라고 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즉 그 당시의 신라 사회상을 이해해야지 조선시대의 성리학을 바탕으로한 윤리적 해석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간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신라사회의 성 인식은 보면 상당히 개방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중요한 자료로 하여 ‘전쟁과 역사’와 ‘한국고대전쟁사’를 집필한 대중역사가 임용한도 당시 신라의 정치 상황이나 고대 사회의 생활상의 묘사를 보면 화랑세기의 성적性的인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외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화랑세기의 내용이 발굴된 성과와 부합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주 월성의 발굴과 포석정이다. 월성 발굴을 통해 동륜태자가 해자에 빠져 죽었다는 사건이 사실로 증명되었고, 포석정 발굴을 통해서 ‘포사’라는 기와 명문은 포석정이 유흥장이 아니라,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문노와 윤궁의 결혼식 처럼 경건한 의식을 위해 쓰인 공간이라는 점 등이다.(물론 월성 정도의 성이라면 당연히 해자가 있었을 거라고 예측하고 ‘소설’을 썼다고 하거나, 필사본의 등장 이전에도 포석정이 의식을 위한 공간이었을 거라고 주장했던 학자들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꾸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포사’라는 명문의 기와가 있을거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 화랑세기의 진위여부는 다만 역사학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문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화랑세기에 나오는 향가 두 수가 국문학사를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전해지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14수와 균여전에 실린 11수로 총25수가 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향가는 ‘송사다함가(풍랑가)’와 ‘청조가’ 등 두 수이다 . 진서론자의 주장은 향가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 연구는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1882.6.4 ~ 1944.2.8)가 1929년에 발표한 ‘향가 및 이두의 연구’와 양주동이 1935년에 발표한 ‘고가연구’ 인데, 박창화의 필사 시점은 1930년대로 추정(1933년 이후)되며 그가 아무리 박식하고 기인 기질을 가졌다 해도 창작을 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본다.(이 작품에 대해 주로 문법적 파악에 주력한 김영욱은 “향가가 가짜라면 그 창작자는 1990년대 국어학계 연구성과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대단한 문법사학자여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위서론자는 박창화가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화랑세기에 나오는 향가가 너무 쉽다는 점과, 문장의 종결하는 어미로 19세기 이후에 쓰여온 것으로 발견된 ‘노奴’ 자는 근대 국어문법적인 요소라고 본다(박창화는 1960년대까지 생존해 있었고 양주동이 1940년대에 향가 해독에 대한 연구를 일정 정도 발표한 상태이기에 1930년대에 필사/또는 창작을 했다고 해도 후일 변개變改 했다고도 보고 있다). 151) 화랑세기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고대사 논쟁은 서울대와 서강대 학파간의 논쟁이기도 하다. 이종욱 교수는 주류 한국사학계가 정립한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 왔으며, 동시에 국사 교과서의 고대사 부분을 계속 비판해왔다. 또 하나 아이러니컬한 점은 서울대와 대립하는 학파로 있는 고려대 사학파는 화랑세기의 논쟁에는 끼어들지 않고있다. 위서론에 지지를 하는것 같지만 서울대 편에 들지는 않는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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