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6. 체로키의 눈물의 길 (2) |
보스톤코리아 2015-09-21, 11:41:33 |
체로키족의 수난 (계속) 체로키족도 백인들의 폭력과 협박에 못 이겨 1836년 말까지 약 6천명의 체로키족이 인디언의 땅으로 이주하였으나 나머지 1만6천명의 체로키족은 끝까지 버텼다. 많은 미국의 양심적인 백인들은 일부 강제이주에 찬성하는 소수의 체로키족 대표들만이 서명한 ‘뉴에코타 조약(Treaty of New Echota)’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의회에 대하여 체로키 족의 강제이주를 집행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예를 들면, 1838년 4월 23일,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던 매사추세츠 콩코드 출신의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잭슨 대통령의 후계자인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체로키 족에 대한 엄청난 불법 행위를 행사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뷰런 대통령은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장군에게 강제 이주 작전을 지휘하게 했다. 스콧은 약 7,000명의 병역을 이끌고 5월 17일 뉴에코타에 도착했다. 약 17,000명의 체로키 인디언과 체로키족이 소유하고 있던 약 2,000명의 흑인 노예들은 살던 집에서 끌려나와 캠프에 수용되었다. 대부분은 짐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다. 캠프로 끌려온 인디언들은 몇 개의 무리로 나누어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강제이주의 길에 올랐는데, 특히 전염병이 창궐하는 한여름과 겨울 추위 속에 이동했던 인디언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강제이주의 험난했던 길을 훗날 사람들은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눈물의 길’은 앞으로 계속될 인디언들의 고난의 ‘길’의 시작이었다. 눈물의 길에서 사망한 사람의 숫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눈물의 길에 동행했던 미국인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엘리저 버틀러(Elizur Butler)는 캠프에서 2,000명, 이주 도중에 2,000명이 죽었다고 추정했다. 그래서 총 4,000명이라는 숫자가 자주 인용되게 되었다. 눈물의 길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불행한 이야기 중 하나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의회는 1987년에 ‘눈물의 길 국립 역사의 길(Trail of Tears National Historic Trail)’을 지정했다. 이 도로는 9개의 주에 걸쳐 있으며, 길이는 총 3,540km에 달한다. 2009년에 미국 의회는 과거의 ‘인디언 부족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미국을 대신하여 원주민에게 사죄한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오바마 대통령도 이 결의안에 서명했다. 일등병 계급의 한 젊은 미군 병사로서 눈물의 길을 따라갔던 버네트(John G. Burnett)는 1890년 12월 11일에 그의 80회 생일을 맞아 그의 자손들에게 눈물의 길에 관한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그 회고담에는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려울 정도의 슬프고 슬픈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가 들려준 사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테네시 주에서 태어나 숲에서 짐승을 사냥하고 개울에서 낚시하면서 원시 자연의 품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인근의 체로키 인디언들과 어울리면서 체로키 말도 익혔다. 세월이 흘러 말단 군인이 된 나는 체로키 말을 할 줄 알았기에 1838년 5월 인디언 강제이주작전에 통역병 보직으로 명령을 받아 역사적인 끔찍한 눈물의 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아무 죄 없는 체로키족들이 미군의 총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자기네 집에서 붙잡혀 나와 강제로 우리 속으로 수용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찬 이슬비가 내리는 10월의 어느 아침에 마치 소나 양처럼 645개의 마차에 실려서 서쪽으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 체로키족 아이들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산속에 있는 그들의 집을 향해서 작은 손들을 흔들며 떠났다. 이 불쌍한 인디언들의 많은 숫자는 담요도 없었고 신발도 못 챙긴 채 집에서 쫓겨 나왔었다. 특히 11월 17일 마지막으로 수용소를 떠나 이듬해인 1839년 3월 26일에 오클라호마에 도착한 체로키족의 경우 눈 폭풍과 영하의 날씨로 인하여 고통이 더 심했다. 이 강제추방의 길은 바로 죽음의 길이었다. 밤에는 불도 피우지 못하고 마차 위나 땅위에서 자야만 했다. 나는 하루 밤 사이에 추위 등으로 22명이 목숨을 잃는 것도 목격했다. 체로키족 추장인 존 로스의 부인인 Elizabeth "Quatie" Brown Ross는 그가 가지고 있던 단 한 장의 담요를 아픈 어린이에게 덮어주고 본인은 밤새 추위에 떨었다. 감기에 걸린 로스 부인은 폐렴으로 악화되어 1839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행군 도중에 체로키 부족의 고통을 들어주기 위하여 일등병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아픈 아이에게는 내 외투를 덮어주기도 했다. 끔찍한 강제이주는 도중에 4000개의 무덤을 만든 후 1839년 3월 26일에 끝났다. 긴 행군 도중 딱 한 가지 불상사가 발생했다. 맥도날(McDonal)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차꾼은 성미가 포악하여 인디언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나하고도 싸우게 되었는데 내한테도 채찍질을 해서 얼굴에 생채기를 내기에 내가 가지고 있던 손도끼로 기절을 시켜버렸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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