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용서 받을 수 있을 때 사과하기
보스톤코리아  2015-02-03, 14:38:46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9일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찾았다. “일본이 세계 평화와 안정에 공헌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연설도 행했다고 한다. 이 정치적 쇼는 별다른 감동을 남기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정작 일본의 전쟁 범죄라는 자신들의 과거사에 대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진지하게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듯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고 망언을 했다가도 “가슴아픈 일이다. (일본의 군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인정하지만, 위안부 문제가 외교, 정치문제로 변질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아리쏭한 입장을 내놓기도 한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내걸고 매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이어진  수요집회가 (2015년 1월 29일부로)1163차례나 열렸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일본정부의 사과와 법적인 배상은 없었다. 대신 고령의 할머니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셨다. 1월 2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분이셨던 황선순 할머니께서 타계하시면서 현재 정부에 등록되어 있는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총 54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더 늦어진다면, 가해자가 용서받을 기회도 피해자에게 남은 상처를 치유할 기회도 영영 얻지 못할텐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일본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있었다. 1980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2차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서명했던 Executive Order 9066에 의해 미국내 일본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를 조사하게 하고, 피해자 중 생존자들에게는 1인당 2만달러씩의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했던 것. Executive Order 9066은 무엇이며, 왜 뒤늦게나마 사과가 필요했을까? 약간의 맥락이 필요하겠다.
미국은 세계 제 2차 대전 발발전과 개전시기 “중립”을 표방했다. 그리하여 스페인 내전 시기, 국제사회에서 파시즘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가 독재정권을 수립하기까지 공식적으로 침묵했다. 그러나 미국은 서서히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전쟁 중인 나라에는 어떤 군수물품도 판매하지 않겠다는 중립적인 태도를 고쳐, 군수물품 판매대금은 현금으로 하고 배달 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캐시-앤-캐리 (Cash and Carry) 정책 (1939)으로, 미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대형 무기창고 (Great Warehouse)가 되겠다는 루즈벨트의 연설 (1939)로, 그리고 이웃집에 불이 났을 때는 일단 화재를 진압할 수 있도록 호스를 빌려주어야 한다는 비유를 들어, 군수물품값은 나중에 받더라도 연합국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 랜드 앤 리스 (Land and Lease) 정책 (1941)으로 점점더 전쟁에 근접해갔던 것.

어쨌거나 2차 대전이 “미국이 직접 개입하는 전쟁”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일본으로부터 왔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 비행기가 하와이의 진주만에 위치한 미군 기지에 공습을 가하자, 다음 날인 12월 8일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이 2차 대전 참전국이 되었기때문이다. 

독일이 주적이었던 1차 대전 때는, 오케스트라에서 베토벤이나 브람스를 연주하는 것도 반애국적으로 비쳐질까봐 꺼려지고, (독일의 함부르크를 연성시키는) 햄버거는 “리버티 샌드위치”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를 정도로 반 독일 정서가 컸다. 그러나 2차 대전 당시에는 역시 적국이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비해 일본에 대한 반일 감정이 훨씬 컸다.

1941년 12월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얼마지나지 않은 이듬해 2월 19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는 서부 연안에 거주하던 일본계 미국인들의 재산을 동결하고 10개의 단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는 행정명령 9066 (Executive Order 9066)에 서명했다.

2차 대전 무렵, 하와이에 거주하던 약 15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외에, 미국 본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계 미국인과 이민자들은 11만명에서 12만명 가량으로 거의 100%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오레곤, 워싱턴 등의 서부 해안지역에 정착해 있었다.즉, 행정명령 9066은 본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 거의 전체에 영향을 끼친 결정이었다. (하와이 지역 일본인들 중에는 만 이천명 정도가 강제 수감되었다).

물론 이 결정에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일본군의 스파이 노릇을 하고나, 혹은 일본군과 협력하여 미국을 공격하든지, 파업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표면적인 이유로 존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주만 공격에 대한 보복심에, 인종주의와, 이민자로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에 대한 집단적 질투 등이 뒤섞인 결정이기도 했다.

어쨌건 강제 수용되었던 일본인들은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풀려나게 되었다. 이들 중 25%는 이민 1세대, 75%는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로 대부분은 미국 시민이었다. 게다가 일본과 마찬가지로 적국인 이탈리아계 혹은 독일계 이민자가 스파이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강제 수용된 사례는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계 미국인 중 한 명인 코레마츠 (Korematsu)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행정명령 9066이 헌법에 명시된 미국 시민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코레마츠는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국가가 위급사항일때 일본계 미국인 개인의 권리는 제한될 수 있다”는 근거에서.

1980년 미국정부의 일본인 이민자들에 대한 “사과”는 충분히 늦었지만, 피해자 중 생존한 누군가는 정부를 용서할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과와 배상도 용서받을 기회가 있을 때 이루어지길 바랄뿐이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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