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령왕, 동굴에서 태어나다
보스톤 전망대
보스톤코리아  2022-05-23, 12:20:14 
공주 무렁왕릉 내부 모습
공주 무렁왕릉 내부 모습
백제 20대 비유왕은 서기 455년에 신하들이 정변을 일으켜 왕을 살해하였다. 혼란의 와중에 21대 개로왕(455~475)이 즉위하였는데 비유왕을 살해한 반란군들이 선왕의 시신을 담보로 삼아 장장 14년동안 한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비로서 14년만에 반란 세력을 고구려로 내쫓고 개로왕이 즉위하였는데, 이번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침범하였다. 이때는 내란의 마지막 끝자락이라서 백제군은 고구려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 다행히 신라가 백제를 위해 원군을 보내주어 고구려를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은 삼국사기에는 자세히 기록된 바가 없고 백제 본기에 쓰인 내용을 일본서기가 기록한 것이다.
당시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으로부터 끊임없이 대단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개로왕은 일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후방 기지를 확보하려고 그의 아우 곤지를 왜에 파견하려고 하였다. 곤지는 개로왕의 진심을 알아보려고 만삭의 후궁 형수를 자신에게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뜻밖에도 개로왕은 자신의 후궁을 선선하게 내주면서 만약에 도중에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아이와 산모를 모두 백제로 돌려 보내라는 조건을 달았다. 
일행이 왜국으로 가던 도중에 개로왕의 말대로 규슈 축자 각라도, 지금의 사가현 가카라시마섬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산기가 돌아 사내아이를 출산하였다(461). 곤지는 아이가 섬에서 태어나서 "섬임금"이라고 이름지었다. 일본서기에는 섬군(島君, Sum Gun)으로 이두 표기되어 있다. 일본 사람들이 미음 받침을 발음하지 못해 "시마"로 발음했고 한자로는 사마(斯麻)로 기록해서 사마왕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후일에 백제 중흥의 영주 백제 25대 무령왕이 된다. 
백제 사람들은 가카라시마 섬을 따로 나리무세마(왕의 섬, 王島)라고 불렀는데, "나리무"는 고대 한국말로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곤지는 약속한대로 사마왕 모자를 본국 백제로 돌려보낸 다음에 난파(지금의 오오사카)에 상륙해서 가와치(河內) 평야에 정착하게 된다(461).
가와치 지역은 현재 오오사카부의 남동부 지역으로 광개토대왕 남진 이후에 백제 사람들은 물론이고 고구려, 신라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고 있던 지역으로 곤지가 이 지역의 족장 노릇을 하게 된다. 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이곳은 편안하게 쉰다는 뜻으로 안숙(安宿)→명일향(明日香) 등으로 이름을 바꿔갔으며 발음은 안숙골에서 아수구→아스까베→아스카로 변하게 된다. 즉, "아스카"는 순수한 우리말로 일본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드린다.

무령왕릉을 지키는 진묘수, 국보162호
무령왕 왕과 왕비의 금관 장식, 왼쪽이 왕의 금관
백제 25대 무령왕 탄생지 규슈 가카라시마 섬
아차 산성

여기까지 곤지왕의 이야기를 일단 마감하고 개로왕의 국제 정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개로왕 18년(473)에 왕은 고구려와의 매듭을 풀기 위해 북방의 대국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협공하자는 제의를 하게 되었고 북위도 사신을 보내 회동할 것을 약속하였다. 불행하게도 북위 사신이 타고 오던 배가 풍랑이 심해 백제에 올 수가 없었다. 개로왕은 북위로부터 연락이 올 것을 기대했지만 감감 무소식이 되어 두나라의 회동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런 과정 중에 장수왕은 도림(道琳)이라는 승려를 첩자로 고용하여 개로왕에게 접근하게 되었다. 
개로왕은 평소에 바둑과 장기 두는 것을 무척 좋아하였는데 바둑의 고수였던 도림은 그점을 이용하여 개로왕에게 접근하게 되었고 도림의 바둑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을 알게 된 개로왕은 도림을 극진히 대접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도림은 개로왕을 부추겨 선왕 비유왕의 능을 증축하게 하고 궁실과 성을 새로 짓게 하였다. 
고구려의 침공을 목전에 두고 국방에 전념해야 할 시점에 궁성을 새로 건축하겠다는 것은 국고를 텅 비우게 하는 어리석은 소치였다. 더구나 첩자 도림으로부터 북위가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장수왕은 475년 9월에 3만의 병력을 동원해 백제를 기습하여 한강 이북의 아단성(阿旦城, 지금의 아차산)을 점령하였다. 
이에 개로왕은 아들 문주(文周)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인(姦人)들의 말을 신용하다 이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태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너도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너는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여라."라고 당부하였다. 
개로왕은 문주 왕자에게 당대 제일의 검객 목리만치와 조미걸취를 딸려 남쪽 신라에게 원병을 청하게 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이 하남 위례성의 북성(北城)을 쳐 7일만에 함락시키고 곧이어 남성을 치니 성안의 분위기가 흉흉하였다. 고구려군의 성세가 워낙 강성해 백제군이 압도 당하자 개로왕이 도망쳐 나갔지만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에게 사로 잡히게 되었다. 그는 왕이 지은 죄를 책망하면서 장수왕이 있는 아단성으로 끌고와 살해하였다. 원래 개로왕을 잡은 재증걸루는 백제의 장군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사람이었다. 크게 일귀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문주는 신라로 가서 1만명의 원병을 얻어 돌아왔지만 한성 백제는 이미 함락되었고 개로왕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에 문주는 목리만치 등과 함께 웅진으로 가서 다시 나라를 재건한다. 환란 중에 다행한 것은 사마왕자는 한성 백제에 없었고 일본에 있어서 참변을 면하게 된 듯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5살이었다.
당시 문주왕을 도와 난국을 정리해준 목리만치는 백제 제일의 검객이었다. 후일에 일본으로 건너가 본국검이라는 일본검도의 원조가 된다. 소가 지방에 정착한 그는 자신의 성씨를 목씨에서 소가씨로 바꾸는데 대를 이어가며 100년이 넘게 대신의 지위를 유지하며 소가왕국을 이끌게 된다.
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아단성은 백제 책계왕때 고구려의 가상 침공에 대비하려고 한강 하류의 전략적 요충지에 세운 산성이었다. 성의 동쪽에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두울머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중량천과 한강이 합류하고 있어 이곳을 장악하면 한강 하류를 지배할 수 있는 전략 요충지였다. 그런 이유로 고구려 장수왕이 아단성을 선점한 것이다.
아단성 정상에 오르면 한강 남쪽으로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허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한성 백제의 북성이 풍납토성이고 남성이 몽촌토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백제가 장수왕에게 하남 위례성을 빼앗기면서 수많은 백제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왜국으로 이동하는 Exodus가 이루어 진다. 학자들은 적어도 15만명의 백제인들이 고향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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