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바꾼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
보스톤코리아  2007-04-06, 11:29:39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총리가 미국 시사주간 타임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포함되었다. 타임지는 해마다 리더 및 혁명가, 빌더 및 거물, 영웅 및 우상, 과학자 및 철학자, 예술가 및 연예인 등 5개 분야에 걸쳐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100인을 선정해 왔다. 올해에는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총리와 함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빅토르 유스첸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주석, 첸수이볜 대만 총통 등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한국인으로는 삼성 이건희 회장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각각 빌더 및 거물, 리더 및 혁명가 분야에서 선정되었으며, 올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 100인에 포함된 말레이시아인은 없었다.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된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총리

인구 280만명의 작은 도시국가. 그러나 정보화와 투명성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며 국가 경쟁력에서는 언제나 1, 2위를 다투는 작지만 강대한 나라 싱가포르. 싱가포르의 발전을 이야기하면서 '리콴유(李光耀, Lee Kuan Yew)'의 이름을 빼는 것은 불가능하다. 싱가포르와 리콴유는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리콴유는 1923년 9월 싱가포르에 정착한 부유한 중국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싱가포르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장학생으로 래플스 대학에서 수학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했다. 케임브리지의 법과대학에서 2과목 모두 수석을 차지하여 은정 방명록의 서두를 장식하는 영예를 얻었으며, 1950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역시 케임브리지에 유학 온 말레이 여성 콰격추와 결혼한 리콴유는 그러나 영국에서 변호사 개업하는 것을 포기하고 싱가포르행 귀국선을 탄다.
영국에서 사회당에 입당하기도 했던 그는 귀국과 함께 노동운동에 가담, 노동자들의 임금협상과 파업 등에 참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정치에 첫 발을 디딘다. 1954년, 공산주의자의 참여 아래 인민행동당을 창당한 뒤 타고난 현실감각과 정확한 판단력에 힘입어 차츰 지지도를 넓히고 당내 극좌분자들의 세력을 제압해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1959년, 35살의 젊은 나이에 영연방 싱가포르 자치령의 총리가 된다.
그때 싱가포르의 GDP는 400달러.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이미 도를 넘어 있었고 심지어는 교통사고로 응급치료를 받고자 할 때에도 뇌물을 주지 않고서는 안될 정도로 싱가포르는 3류 후진국이었다. 리콴유는 총리를 맡으면서 부정부패 척결에 국가의 사활을 걸었다. 그는 반부패법을 개정하고 관료들의 청렴 의무를 강조하며, 부정을 저지른 공무원들은 자신이 아끼는 측근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처단했다.
1965년 말레이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싱가포르의 초대총리가 된 리콴유는 취임선서식에서 흰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국민들에게 청렴과 정직을 맹세했다. 그후 부정부패 방지와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한 리콴유는 마침내, 공직자 사이에 청렴성을 뿌리내리고 일반 시민들의 생활 속에서 부패를 허락하지 않는 전통을 자리잡게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부정부패가 사라지자 경제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치안, 사법, 보건, 교육, 수송, 노동, 서비스 부문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 외국기업들이 앞다투어 싱가포르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미스터 클린 아시아(Mr. Clean Asia)'로 불리며 아시아의 주도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90년 리콴유 총리는 후계자 고촉동 총리에게 정권을 이양하며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때 싱가포르의 GDP 1만2200달러. 현재 싱가포르 GDP는 3만불에 달한다.
2004년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큰아들 리셴룽을 새 총리로 맞았다. 리셴룽 총리는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수석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수학한 후 군에 들어가 공군 준장에 올랐으며 32살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지만, 30년 동안 엄격한 사회통제 아래 부패척결과 경제성장을 이뤄낸 아버지의 후광이 없었다면 그 결과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엄격하게 국가를 통제한 까닭에 국내외로부터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리콴유의 깊은 철학과 통찰력에서 우러나온 비전, 그리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과감한 도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싱가포르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그에 대한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존경 역시 인구에 회자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철학자의 제왕, 리콴유

리콴유는 마치 작은 양복을 입고 있는 몸집 큰 사람처럼 좀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풍긴다.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서 그는 마치 기름칠 잘 된 기계처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윙윙 돌아가는 작은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싱가포르는 질서정연하고 효율적이며 무엇보다도 골치 아픈 반대의 소지가 없는 예측가능한 나라다. 81세의 리콴유 전 총리는 비록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고문장관(Senior Minister)으로서 그의 사회 모델을 미세하게 조정하고 있다. 한때 리콴유는 그의 도시국가 시민들을 '디지트(digits)'라고 불렀다. 그의 '디지트'로서의 자질 역시 사회적인 엔지니어링을 통해 향상될 지도 모른다. 리콴유는 그의 국가를 엄격한 규칙에 순응하는 것만이 성공의 지름길인 기숙사학교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리콴유는 그의 비전을 반영할 수 있는 좀 더 큰 무대를 가졌으면 하고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 국가 리더들에 대한 지치지 않은 설교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미래를 만들어가기에 싱가포르는 너무 작기 때문에 리콴유는 아시아 철학자의 제왕 정도로 역사에 남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진화론의 마지막 옹호자인 리콴유에게 정치란 민족의 피트니스를 위한 끝나지 않는 싸움이다. 대단히 독창적인 것은 없지만, 싱가포르의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 전문 기술자에게 경제와 정부, 사회 조직의 운용을 맡기려는 논리·운동-편집자 주)는 경제성장과 사회규율,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정치적 권위주의를 결합하며, 성공적인 근대화를 위한 설득력 있는 모델을 제공한다. 마오쩌뚱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은 거대한 싱가포르를 건설하고 싶어한다. 10억의 인구로 그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바람직하기는 할까?


(이은실 기자: yeslady@empal.com)


기사제공 : 코리안프레스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중국, 베이징 올림픽 메달에는 '옥반지'가 박힌다 2007.04.10
다음해 열리는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입상자들은 뒷면에 옥반지가 박혀있는 메달을 받게 된다. 올림픽 D-500일인 지난 27일 베이징올림픽조직위원회(BOCO..
브라질 관광산업, 7.2% 성장 예상 2007.04.10
관광수익, 880억 달러 예상 국제관광업체들로 이루어진World Travel & Tourism Council(WTTC) 위원회에서 지난주에 발표한 조사에..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바꾼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 2007.04.06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총리가 미국 시사주간 타임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포함되었다. 타임지는 해마다 리더 및 혁명가, 빌더 및..
과학자들이 말하는 "인류의 10대 종말론" 2007.04.06
위협적인 요소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10명의 과학자들의 견해를 4월14일 자에 실었다. 과연 인류의 종말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사람들은 대폭발과 더불어 갑작스러..
2007 정해년(丁亥年) "황금돼지해라구요?" 2007.04.06
“올해가 황금돼지해라구요?”   기업들은 앞다퉈 황금돼지띠 마케팅을 벌이고 있지만 이에 대해 민속학자 한국학연구가 역술가 등 이 분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