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깃든 우리 역사 9 : 교태전(交泰殿)
보스톤코리아  2010-05-10, 12:21:01 
용마루가 없는 왕비의 침전 교태전
용마루가 없는 왕비의 침전 교태전
편전인 강녕전 뒤쪽의 양의문(兩儀門)을 사이에 두고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다. 광화문과 근정전을 연결하는 경복궁의 중심축에 있는 건물들 가운데 맨 마지막에 있는 건물이 교태전이다. 말 그대로 궁궐의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한 구중궁궐의 대명사인 왕비의 침전이다. 임금이 들러서 자고가는 시어소(時御所)로 중궁전이라고도 부른다.

왕비를 칭할 때 중궁(中宮)또는 중전(中殿)이라고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왕후의 칭호를 최초로 사용 한 때는 통일 신라의 30대 문무왕의 비(妃)를 자의 왕후라고 칭한 것이 처음이고 그 이전에는 부인(夫人)으로 칭하였었다.

조선의 왕비들은 왕비가 되는 순간부터 두가지 커다란 임무를 떠 맡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는 왕자를 생산하는 일이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남의 가문으로 출가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집안의 후사를 이어주기 위한 것 이었다. 왕비의 경우는 대통을 이어줄 왕자를 출산 하는 것만큼 큰일은 없었다. 왕비는 종사침(種斯枕)이라는 베개를 사용했다고 한다. 종사란 한번에 아흔아홉개의 알을 낳는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을 말하는데 왕비에게서 많은 자손을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왕비 침전의 이름을 교태전 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예전에 정업원이 있었던 숭인동 청룡사
예전에 정업원이 있었던 숭인동 청룡사
 
교태(交泰)는 여자가 요염하게 보이려는 교태(嬌態)가 아니다. 교태(交泰)의 태(泰)는 주역의 괘(卦)이름이다. 이괘는 하늘과 남자를 나타내는 건(乾三) 이 밑에 있고 땅과 여자를 나타내는 곤(坤 三三)이 위에 있다. 즉 천지가 거꾸로 된 것이지만, 이것이 도리어 왕자를 출산 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말하자면 밑에 있는 하늘의 기(氣)는 위로 자꾸 오르고 위에 있는 땅의 기는 아래로 자꾸 내려가는 성질을 갖는다.

만일에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밑에 있다면 하늘과 땅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교합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태괘(泰卦)에서는 밑에서 올라오고 위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자연스레 교합(交合)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태전(交泰殿)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교태전의 지붕도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다. 이유인즉슨 교태전은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집이다. 그런데 왕은 용이다. 그런 용이 다음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는데 또 다른 용이(용마루)지붕 꼭대기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는 것이다.

창덕궁에 있는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에도 용마루가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왕비의 두번째 임무는 내외명부(內外命婦)를 관장하는 일이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장소가 교태전이다. 내명부라는 것은 궁궐 안에는 왕비 말고도 임금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빈(嬪), 귀인(貴人)을 비롯한 후궁들이 있고, 궁에서 일하는 상궁(尙宮), 상의(尙儀)를 비롯한 수많은 궁인들을 통털어 내명부라고 한다.
정업원 구기 비석이 안치되어 있는 비각
정업원 구기 비석이 안치되어 있는 비각
 
외명부(外命婦)는 궁밖에 살고 있는 공주, 옹주, 군주(세자의 딸), 현주들과 이들과 혼례를 치른 부마들, 또 여러 대신들의 부인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권한을 왕비가 쥐고 있으며 국왕도 내외명부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왕비도 임금처럼 기상 시간이 파루(새벽 4시경)를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일어나 치장하고 웃어른들에게 문안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내명부에 지시를 하고 외명부의 방문객들을 접대하게 된다.
종묘 외에도 궁궐에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뽕나무 잎을 따서 누에를 키우는 친잠례 같은 행사에도 참석을 해야 하는 바쁜 일정을 보내야 했다.

그 많은 행사중에도 제일 왕비에게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역시 왕자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수많은 궁인들 중에 임금이 총애하는 여인들이 어디 한둘 뿐이겠는가? 그러니 임금은 밤낮으로 바쁠 수밖에. 그렇다고 왕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고, 모처럼 임금이 왕비와 잠자리를 함께 하려 해도 길일(吉日)을 택하여야 한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딸 것이 아닌가 말이다. 행여나 임금이 왕비를 소 닭보듯 하게 되면 왕자 생산은 물 건너간 일이다.

교태전에서 임금과 왕비가 합방할 때는 우물정자(井) 모양의 9개 방에서 제일 가운데 방으로 사방에서 창호지 한겹을 사이에 두고 상궁들이 귀를 고추세우고 두분의 동정을 살피고 있으니 왕자 생산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업원 구기 비각
정업원 구기 비각
 
다행히 왕비가 임신을 하게 되어 순산을 하게 되면 산실에 깔았던 자리를 문앞에 걸어 널었는데 이것은 민간에서 출산한 다음에 금줄을 거는 전통과 똑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왕비가 임금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지만 임금이 맘에 드는 궁녀와 관계할 때는 때와 장소를 크게 가리지 아니했다고 한다.

궁녀가 임금을 처음으로 모시고 아침에 나올 때는 겉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온다. 이것은 “자신이 어젯밤에 승은을 입었다.” 라는 뜻이다. 그러나 진짜로 승은을 입으려면 군(君)이나 옹주를 출산하여야만 장래를 보장받는 승은을 입게 되는 것이다.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면 임금이 사망한 다음에는 정업원(淨業院)으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업원의 업(業)이란 임금 한사람만을 섬겨야 한다는 족쇄를 일컫는 업보의 업이다. 지금 종로구(예전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고려말에 세운 청룡사라는 비구니 절이 있는데 이곳에 정업원이 있었다.
고려말에 공민왕의 후비였던 안씨가 공양왕 시절에 이성계에게 옥쇄를 넘기고는 정업원 주지가 되는 것을 시작으로 궁궐의 여인들이 계속 비구니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조 개국초에는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세자 방석이 살해 당하자 그의 누이인 경순 공주가 이곳에 들어왔고, 단종비 정순 왕후 송씨(定順王后 宋 氏 1440~1521)가 궁에서 물러난 뒤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정순 왕후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자 이곳에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안녕을 빌었다. 단종이 죽은 후 1521년(중종16)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다. 훗날 영조(英組)가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되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였다.

해맑은 10월 어느날 돈암동 처갓댁에 들렸다가 정업원이 있었던 숭인동 청룡사를 찾아갔다.
정업원과 마주하는 봉우리에는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정순왕후가 단종이 있는 영월쪽을 좀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곳이라고 한다.

정업원터에 있는 비석에는 “정업원구기(눈물을 머금고 쓰다)”라는 글씨가 영조의 친필로 쓰여져 있다.
비석을 모신 팔각지붕의 비각에는 역시 영조대왕의 친필로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 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바로 이곳이 후손이 없는 후궁들이 임금이 돌아 가신후에 들어와 살던 정업원이다.

예전에는 숭인동 전차 정거장에서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지만, 지금은 보문동 탑골승방에서 청룡사까지 길이 뚫려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영조 대왕의 친필로 쓰여진 비석이 안치 되어 있는 비각은 문이 잠겨 있어서 아래 문틈을 통해 간신히 찍을 수 있었다. 비구니 주지스님에게 등떠 밀려 나오면서 천신만고 끝에 찍은 사진이다. 한많은 애환을 담고 사는 수많은 여인들의 안식처인 정업원도 선조때에 도성 안에 절이 있는 것을 항의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계속되어 1612년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됐었다. 왕하고 잠자리 한번 했다고 일생을 족쇄를 차고 사는 불쌍한 여인들은 어데로 가야 하는지 공자님이 살아 계셨다면 이들 여인들을 위한 처소가 마련 되었을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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