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다시보기-사가현 I
보스톤코리아  2009-03-09, 16:27:31 
오늘 여정은 후쿠오카에서 사가현을 거쳐 규슈 서쪽에 있는 나가사키 현의 하우스 텐 보스까지 가게 되어 있다.

후쿠오카에서 규슈 종관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오면 후쿠오카현 제일 남쪽에 종묘 연구소로 유명한 구르메시를 통과한 다음에 토수(島酒) 인터체인지에서 34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야요이 고대 문화 유적지인 요시노 가리를 거쳐 사가현에 도착하게 된다.

후쿠오카 현에서 사가현에 들어오기까지는 첩첩산중을 돌아 나오는데 이 깊은 산 속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스기나무와 히노키 나무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명치 유신 때 전기를 처음 사용하게 되어 전신주용 나무가 많이 필요하게 되어 이 두가지 수종을 식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기나무는 제일 좋은 건축 재목으로 알려져 있는데 히노키 나무도 집을 짓는데 있어 마루나 벽을 까는데 일급 건축 재료라고 한다. 히노키 나무 속껍질을 응달에 말려 지붕을 까는데, 나무에서 나오는 냄세에 큰 방충효과가 있어 한번 깔면 60~70년동안 지붕을 다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일본의 젓가락도 이 나무로 만드는데 80%는 수입 원목을 사용한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산에 나무가 많은 것을 은행에 돈을 예금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1억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식목하고 있는 것이다. 사가현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현이다.

그래서 지금 부산과 사가현을 잇는 해저 터널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운 것이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가현에는 유독 한반도와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이 일구어 논 카라츠와 아리타의 도자기 산업, 요시노가리에 있는 야요이 고대 역사 유적지, 이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의 고향도 사가현이다. 유독 이곳에는 한국의 장승들이 많이 있다. 임진왜란 때는 한국에서 까치까지 잡아와서 천연기념물로 보호하고 있다.

임진, 정유왜란을 일본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전에는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의 식기가 대부분 목기(木器)였고 상류층은 칠기를 사용하는 정도였다. 자기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 고가의 사치품이라서 꿈조차 꿀 수가 없었다.

당시에 세계적으로 도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많았으나 도기보다 한 단계 위 고급품인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뿐이었다. 더구나 당시에 일본은 다도가 유행할 때라서 조선의 다기는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 정유 왜란 때 일본 장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하듯 조선의 도공들을 잡아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본 3대 도자기는 사가현의 카라츠(唐津), 아리타(有田)와 가고시마현의 사츠마 도자기를 꼽는다.

카라츠의 데라자와 히로타카 아리타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가고시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조선에서 잡아온 도공들이 일구어 논 업적이다.

1)사츠마 도자기
전라도 남원에서 80명의 도공들과 함께 끌려와서 사츠마 도자기의 시조가 된 사람이 심당길(沈 當吉)씨로 지금 심수관 씨는 그의 15대손이 된다. 불가사의하게 심수관 씨 가계는 15대에 걸쳐 한국 여자들하고만 결혼을 했고 14대에 걸쳐 외아들만으로 이어져 오다가 지금의 심수관 씨만 아들 두 명을 두고 있다. 400년동안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고 심씨를 고수하고 있다. 심씨 가(家)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초대 심당길 씨가 만든 차 그릇의 이름이 “히바라끼”였다. 우리 말로는 “불(火)만으로” 라는 뜻이다. 불은 일본 것이지만 흙, 유약, 도공은 조선것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역사 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가 1968년에 발표한 “고향을 어찌 잊으리오까”는 심수관 가(家)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쓰마 야키가 탄생되게 된 과정을 쓴 이야기이다. 국내에서는 한수산 씨가 1999년에 “400년의 약속”을 발표하였다.

2) 카라츠(唐津)도자기
일본인들은 우리의 고대 국가 가야를 가라(加羅) 또는 한(韓)으로 표기하였는데 발음은 둘 다 모두 카라라고 불렀다. 카라츠라는 항구는 예전부터 가라국 또는 한반도와의 교류를 담당했던 항구도시였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에게 붙들려온 조선의 도공들이 도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나가자토(中里), 오오시마(大島), 후쿠모토(福本) 라는 세 집안 사람들이 조선에서 잡혀와서 합세하게 된다.

나가자토 집안 선조의 우리말 이름이 우칠(又七)이었고 오오시마의 성이 윤씨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나가자토 집안의 13대손은 지금 일본의 인간 국보가 되어 있다. 카라츠 도자기는 다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3) 아리타 도자기
아리타는 원래 다나카(田中村)라는 이름의 도자기 마을이었으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케가 900여 명의 조선도공들을 데려오면서 원래 살고 있던 일본인 도공들을 쫓아내 버렸다.

이들 900여 명의 우두머리가 지금 도조(陶祖)로 불리우는 이참평(李參平)이었다. 그는 (1579 ­ 1655) 공주군 반포면에서 태어났고 1598년에 아리타에 끌려와서 1605년에 아리타의 뎅구다니(天狗谷)에 도기를 굽기 시작하다가 1616년에 근처의 아리타 이즈미 산에서 백자 광맥을 발견함으로 일본에서는 최초로 자기를 생산하게 된다.

아리타는 자기의 원료가 되는 양질의 고령토가 있고 연료와 물이 풍부해서 도자기 산업에는 아주 적격의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던 것이다. 나베시마 번주는 당시에 최첨단 산업인 자기 생산을 비밀로 하려고 도공들을 한 곳에 모여 살게 하고는 근처에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또 여기서 생산되는 자기는 아리타 북쪽에 있는 이마리(伊万里)항구에서만 엄격한 감시 하에 일본 전역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 당시에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중국의 자기를 유럽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은 명나라가 망하고 신흥 청나라가 대두되는 혼란한 시기라서 자기의 생산이 충분하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동인도 회사는 아리타의 도자기로 수입선을 바꾸어 유럽으로 수출하게 되었다. 결국 아리타의 도자기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독일의 마이센 지역에 소개되면서 이곳에서 유럽 최초의 자기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아리타와 마이센은 자매도시가 되어있다.

우리는 역사의 한 순간, 순간이 그 나라 그 민족의 장래에 너무나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아왔다. 막상 고국 조선에서는 천대받는 도공들이었지만 비록 끌려 왔을 망정 일본의 위정자들은 그들을 우대해가며 국가 산업에 크게 이바지하는 도자기 산업을 이룩해 놓은 것이다.

지금 인구가 만 명이 조금 넘는 아리타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만 연 3억 달러를 초과하고 있다. 일본 전역을 합치면 어마어마한 액수가 된다. 지금 아리타 도자기는 수출항인 이마리 항구의 이름을 따서 이마리 야키로 전세계에서 불리우며 사랑을 받고 있다.

이참평이 도자기 가마를 연지 300년이 되는 1917년에 그의 업적을 가리는 “도조 이참평”이라는 비를 세웠다. 매년 5월 4일에 이곳에서 도조제가 열리고 있다. 아리타에는 오진 천황,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그를 모신 도산 신사가 있다.

도산 신사 도리이에는 두 줄의 글귀가 써 있는데 한글로 풀어서 쓰면 “마을의 영화와 빛남이 천년간 이루어 지고, 큰 은혜와 좋은 향기를 만고에 이어 주소서” 이참평의 혼령이 아리타의 번영을 지켜 달라는 뜻이다.

지금 아리타에서 가네가에(金江), 도꾸나가(德永), 후쿠도미(深海), 마쯔모토(松本), 후루타(古田), 이와나가(岩永), 히사토미(久富)라는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선 도공들의 후예다. 이참평의 13대 직계 후손인 가네가에 삼페이(金江三兵衛 )는 이참평의 고향이 금강 유역이라서 金江이라는 성으로 부른다고 한다.

사실 금강의 금자는 쇠김이 아니라 비단 금(錦)이 맞는 것이다. 도조 이참평은 그를 받드는 비가 세워졌고 신(神)으로 받들어져 있지만 연고자도 없이 죽어간 880기의 이름 없는 묘소가 이곳에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도 모르게 죽어간 도공들의 원혼을 그 누가 위로해 줄 것인가? 당시 조선인 도공들 사이에 유행하여 도자기에까지 써넣었다던 한시가 있다.
원공독각업육십루(遠公獨刻業六十漏). 즉 멀리 있는 님은 내 마음에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도공으로 60년 한 평생을 보내야 한다니 눈물만 흐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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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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