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화랑세기花郞世紀, 20세 풍월주風月主 예원공禮元公(9)
보스톤코리아  2021-05-17, 11:12:14 
심청전의 근원(모티브)이 되었다는 두 설화, 즉 ‘지은설화知恩說話(또는 연권녀連權女설화)’ 와 ‘거타지설화居陀知說話’ 의 시대적 배경이 신라의 제 51진성여왕(? ~897년, 재위 887~897년) 이다. 그런데 김춘추가 처음 당으로 갈 때인 648년에도 이미 신라인들은 해신이 노하여 풍랑을 일으킨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다. 당시 당나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여자를 해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순항을 빌자고 한데 반해 김예원이 “인명이 지극히 중한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 하며 제지한 것으로 보아, 이미 7세기 이전부터 인신공양으로 순항을 비는 관습이 있었고 동시에 이는 터무니없는 미신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뱃사람들이 주공(김춘추)이 더 중하다며 여자를 바다에 던지자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그런 관습과 미신의 충돌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다만 어느 문헌에도 해신에게 제물로 여자를 바쳤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심청전만이 있을 뿐이다. 당시 신라는 이미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기에, 여기서 사기(골계열전)에 실여 있는 ‘서문표西門豹의 이야기’ 를 한번 보면서 당시 사람들의 ‘인신공양관’ 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서문표는 성이 서문이고 이름은 표이다. 위나라 문후(재위 기원전 445~396년) 때의 사람이니, 예원이 김춘추를 수행하여 당나라로 가던 시기보다 천년전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위나라 문후가 서문표를 업 땅에 유수로 임명하였다. 서문표가 변방 업에 도착해보니 민심이 썩 좋지가 않았다. 장로長老 몇명에게 물어보니 하백河伯 -    하수/황하의 신 – 에게 신부감을 바치는 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가난도 면치 못한다고 하였다. 서문표가 그 내막을 들어 보니, 삼로三老와 아전들이 백성들이 감당하기 힘든 세금을 거두어 그 중 일부는 하백에게 신부감을 바치는 비용으로 쓰고 나머지 대부분의 돈은 무당들과 함께 나누어 가진다고 하였다. 무당들은 그 시기가 되면 가난하고 힘없는 집에 아름다운 처녀를 하백의 신부로 지목하여 데리고 가서, 물가에 지은 재궁에 ‘모셔놓고’ 단장을 하여 10여일 기다렸다가 고운 방석에 이부자리를 깔고 물에 뛰어 보낸다고 하였다. 신부감으로 선발된 처녀는 얼마간은 물에 떠서 흘러내려 가다가 곧 가라 앉게 되니, 딸 가진 집안은 두려워서 야반도주를 하였고, 남은 사람들은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니 민심이 흉흉하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하백에게 신부를 매년 바치지 않으면 하수의 강물이 넘치게 하여 모두 빠져 죽을거라는 말 또한 믿고 있었다. 
서문표는 다음 행사 때 꼭 참석하여 ‘신부’ 를 전송하고 싶다고 말하고 나서 다음 연례행사일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강가에는 삼로三老와 아전, 유지들과 무당들이 모여서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구경하러 온 백성들도 수천이나 되었다. 늙은 무당은 홑옷을 입은 여제자 10여명을 따르게 하며 행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이 때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의 신부감을 불러 오거라.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확인해야겠다.” 임시로 지은 재궁에서 데려온 처녀를 본 서문표는 이 여자는 아름답지 못하니 할멈 무당이 하백에게 가서 더 아름다운 신부감을 구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하게 했다. 이에 군사들이 할멈 무당을 강물에 넣었다. 너무 뜻 밖의 일이라 모인 백성 모두가 대경실색했다. 조금 있다가 서문표는 “어째서 할멈 무당이 오래 걸리는가? 제자들을 하나 더 보내 재촉하게 하라!” 하였다. 이렇게 몇명의 제자들이 강물에 던져졌다. 그러나 물론 돌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문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당과 그 제자들이 모두 여자라서 사정을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니 이번에는 번거롭지만 삼로가 들어가서 알리시오” 하였다. 그리고 삼로를 강물에 넣고는 의관을 다시 정제整齊하고 나서 강을 향하여 절을 몇번 하고 나서 기다렸다. 모인 사람들은 더욱 놀라고 겁을 먹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서문표는 “무당들과 삼로들 모두 돌아 오지 않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그리고 나서 아전과 고을 유지들을 한 사람씩 강물에 넣으려고 하였다. 겁에 질린 그들은 머리를 땅에 쳐박으니 피가 흥건했고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서문표는 “좋다, 잠시 멈추고 기다려 보자” 했다. 한참 후 그는 “모두 일어나시오. 하백이 손님들을 오래 붙잡고 있는 모양이니 여러분들은 모두 이 행사를 여기서 마치고 돌아가시오” 라고 하였다.
그 후로 업 땅의 모든 아전들과 못된 장로들은 감히 다시는 하백을 위하여 신부감을 바쳐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현명한 태수를 맞이한 백성들은 감읍하였고 도망갔던 백성들도 돌아왔다. 서문표는 곧 백성들을 동원하여 12개의 수로를 파서 강물을 끌어 농사를 짓게 하였다. 하지만 고역을 감당해야하는 백성들은 주저하였다. 그는 지금은 힘들지만 한번의 공사로 100년이 풍요로울거라며 설득하였다. 과연 그의 수리공사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후일 중앙의 관리들은 그의 수리水利가 황제의 치도馳道를 가로지르고, 12개의 교량이 서로 가까이 있어 황제의 행차를 끊는다며 고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업땅의 부로들은 서문표가 한 일은, 즉 어진 사람이 이룩한 업적은 사리사욕에 의해 고쳐져서는 안된다고 맞섯기에 그대로 두었고 그의 이름과 은택恩擇은 먼 후대까지 이어졌다. 고질적이었던 미신타파와 감뭄해소를 위한 수리공사를 건설한 서문표는 공자의 공문십철孔門十哲336) 로 꼽히는 자하子夏의 제자이다.>

336) 공자는 제자가 3천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제자를 ‘72현賢’ 이라고 한다. 십철은 그 중에서도 최고를 뽑은 제자들이다. 공자 왈, 덕행에는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에는 재아, 자공, 정사에는 염유, 자로, 문학에는 자유, 자하가 뛰어나다고 하였다. 이 중 민자건의 후손 민칭도는 고려 때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해 여흥민씨의 시조가 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사기(사마천),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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