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화랑세기花郞世紀, 18세 풍월주風月主 춘추공春秋公(8)
보스톤코리아  2020-11-23, 11:23:42 
어느날 예언자 나탄(Nathan)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David)왕을 꾸짖고 저주했다. 그리고 갓 태어난 다윗의 아이는 일주일만에 죽었다. 이스라엘의 2대왕 다윗이 신으로 부터 벌을 받은 것이다. 그 아이는 밧세바(Bathsheba)가 낳았는데, 다윗의 사통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밧세바는 원래 우리아(Uriah)의 아내였다.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가 있던 어느날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그녀의 미모에 빠져 여러차례 통정을 하였다. 결국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자 다윗왕은 전쟁터의 우리아를 불러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아는 부인이 있는 집으로 가지 않고 전우들과 함께 야영하였다. 이에 다윗왕은 밧세바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아를 제거하기로 계획하였다. 우리아로 하여금 부하 장수인 요압(Joab) 에게 서신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 서신의 내용은 요압장군에게 내리는 명으로 우리아를 도저히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위험한 전투에 보내라는 것이었고, 결국 우리아는 전사하였다.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밧세바와 혼례를 올렸다. 곧이어 사통으로 임신했던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다윗은 신의 저주을 받았고 갓 태어난 아들을 잃었다. 이후 밧세바는 둘째 아들을 낳았고, 그가 이스라엘의 3대왕인 솔로몬(Solomon)이다(사무엘하 11장, 12장, 열왕기상 1장).   

642년 8월(선덕여왕 11년), 백제 장군 윤충이 1만의 군사를 지휘하여 신라의 대야성(현 경남 합천) 을 공격했다. 신라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하지 못한채 성주 김품석은 항복하였고, 먼저 성을 나간 군사들이 살해 당하자 그는 부인 고타소와 자식들을 죽이고 자살하였다. 이렇게 대야성이 허무하게 함락된데는 부하 검일黔日이 신라에 반역하고 백제군과 내응하여 모척毛尺과 함께 창고에 불을 지른 사건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식량 등을 보관했던 창고에 불이나니 성안의 민심은 흉흉해졌고 군사들은 사기를 잃었다. 그래서 보좌관 서천은 항복을 권유했고, 화랑 죽죽은 결사항전의 태세로 항복을 만류했다. 김품석은 서천의 말을 듣고 항복하였고, 항복하여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상황을 판단한 그는 처자를 죽이고 자살하였다. 그러자 죽죽은 화랑 용석과 함께 성문을 걸어 잠그고 항전하였다. 하지만 끝내 성은 함락되었고 죽죽과 용석 그리고 그들이 이끌던 모든 군사들은 장렬히 전사하였다. 윤충은 김품석의 목을 잘라 사비성으로 보냈다. 그의 유골은 647년 김유신이 대야성 설욕전에서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과 교환되었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했을 때 김춘추(태종무열왕) 는 검일과 모척을 잡아 반역의 죄를 물어 사지를 찢어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그럼 검일은 왜 반역하였는가? 그는 원래 대야성 사람으로 도독 김품석의 막객幕客으로 사지(13등급)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절세미인이라 그만 김품석이 빼앗고 말았다. 그후 그는 앙심을 품고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642년 백제의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하자 내응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고 칼 끝을 반대로 돌렸다. 

이 전쟁에서 화랑 죽죽은 죽음을 무릅쓰고 부하 용석과 함께 잔병들을 재정렬하여 항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두 백제 장군 윤충의 손에 죽었다. 임금과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죽죽의 충성을 기리는 기록이 삼국사기(권 47) 열전에 13인의 전사 중의 한명으로 전한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그는 대야주 사람으로 아버지 학열은 찬간撰干을 지냈다. 죽죽의 관등은 사지舍知로 대야성 도독 김품석 휘하에 있었다. 선덕여왕 11년(642년) 가을 8월에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대야성이 함락되었고, 성주 품석은 처자를 죽이고 자살을 했다. 남은 병졸들을 모아 항전하다가 부하 용석과 함께 전사하였다.” 

삼국사기만 보면 아버지 학열만 나오고 선대는 없다. 그런데 화랑세기와 함께 보면 죽죽의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아주 자세하게 나온다. 그들의 가문은 품品이 없었다. 그들이 지낸 벼슬이나 관등으로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학열이 지낸 벼슬은 찬간으로 외위外位의 다섯째 등급이니 경위의 나마(11등급) 에 해당되었고, 죽죽은 642년 당시 13등급의 사지였다. 화랑세기(13세 풍월주 용춘공조) 에 보면 죽죽의 할아버지 대남보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온다. 그는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많은 재물을 모았다. 그리고 그 재물을 화랑도와 풍월주 용춘을 위하여 다 사용하였다. 그의 충성심을 듣고 진평왕은 그를 궁사지宮舍知에 임명하여 재용을 관장케 했다. 그는 여전히 청빈하게 살다보니 장남 학열을 비롯한 삼형제는 어머니와 함께 길쌈을 하면서 연명하였다. 풍월주 용춘이 이를 목격한 후 학열을 승부乘府의 오지烏知(아마 15등급인 대오나 16등급인 소오 중 하나로 보인다) 로 천거하여 가족을 돌보게 했다. 나중에 14세 풍월주 호림공은 학열 삼형제를 모두 등용하여 낭두郎頭로 삼았다. 화랑세기에는 죽죽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13세 풍월주 용춘공전에 보면 찬간 학열이 대남보의 아들로 등장하고, 삼국사기 열전에는 죽죽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학열이 대남보의 아들인 것이다. 이렇듯 화랑세기에는 아버지의 아들로, 삼국사기에는 아들의 아버지로 단 한 차례씩만 등장하는 학열을 통하여 충신 죽죽의 할아버지가 미천한 출신의 부자富者 대남보라는 가족관계가 입증된다. 대야성 전투에서 죽죽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용석은 누구인가?  그는 풍월주 김용춘의 서자이다, 즉 첩 대씨의 아들이다. 대씨는 대남보의 딸인데 용춘의 후처가 된 내용 역시 화랑세기(13세 풍월주 용춘공조) 에 자세히 나온다. 많은 기록을 역사서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대죽죽과 김용석은 나라와 임금을 위해 임전무퇴한 화랑의 으뜸가는 표상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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