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고의 횡설수설 7 ] 도토리 가라사대
보스톤코리아  2020-01-27, 11:56:35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보다 더 내 심정을 딱 짚어낸 시가 또 있을까? 안도현 시인 만세. 근데, 넌 누구냐고? 나 도토리야. 도토리 함부로 밟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유익한 존재였느냐. 내 심정이 이렇거든. 개밥의 도토리라는 둥, 도토리 키 재기라는 둥, 온갖 말로 나를 폄하하는데, 인간들아 제발 그러지 마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오로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거 알아? 땀을 뻘뻘 흘리며 등산을 마치고 산기슭에 내려와서 동동주 마시지? 그때 꼭 도토리묵 찾잖아. 도토리 묵 없는 동동주를 상상이나 할 수 있어? 어쩌면 도토리묵을 먹기 위해 동동주를 마시는지도 모르지. 

요즘 나 도토리가 귀하셔서 중국산 도토리로 묵을 만든다고 하던데 그건 저 멀리 태평양 건너 한국 이야기이고. 여긴 도토리가 참 흔하지? 백수십년 전 보스턴에 왔던 유길준은 “미국은 물이 흔한 나라”라고 <서유견문>에 썼더군. 농업국가에서 왔으니까 풍부한 물이 눈에 들어온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왜 나 도토리를 못 본 걸까? 그가 다시 온다면 틀림없이 미국은 도토리가 흔한 나라라고 썼을 텐데. 지천으로 깔린 도토리들과 인증샷도 한 방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을까. 

내가 얼마나 인간에게 유익한 존재인지 이야기좀 들어봐. 나 도토리는 우선 인간들에게 시적 영감을 주기도 해. 언어유희 말이야. 뜨거운 도토리는 핫토리(はっとり), 큰 도토리는 빅토리(victory), 그리고 산에 사는 도토리는 산토리니(Santorini)? 시를 쓰려면 우선 운을 맞춰야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필요하지. 그리고 인간들아, 내가 어디 사는지 궁금하지?

난 린네 가에 살아. 영어로는 Linnaean Street이라 써.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 이후 가장 많은 동식물 이름을 지은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에서 따온 이름이야.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난 미국의 다음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집에 살거든. 린네 가에는 나 말고도 내 사촌 팔촌 사돈의 팔촌은 물론 수많은 친구 도토리들이 살아. 궁금하면 와서 봐. 워런 의원이 대통령이 되면 나를 백악관으로 초대할지도 몰라. 여름에는 나의 넓은 가지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가을에는 수많은 도토리로 다람쥐와 새들을 불러모아 주었으니까. 

다람쥐들이 나를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거 잘 알지. 다람쥐들이 겨울 식량으로 우리를 여기 저기 숨겨놓고 찾지도 못하는 걸 보면 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으로 이루어진 영양 만점 도토리를 좋아하는 건 너희 인간들도 마찬가지잖아. 한국인뿐이 아니지. 중국의 의서 <본초강목>에서도 흉년에 사람들이 도토리로 밥을 해먹거나 찧어서 가루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어. <동의보감>에서도 도토리는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으며 설사와 이질을 낫게 하고 장과 위를 든든하게 하여 몸에 살을 오르게 한다고 했어. 뿐만 아니라 뼈를 튼튼하게 하고 살을 빼는 데도 특효가 있으며, 지혈작용과 몸 안의 중금속을 제거하는 데 효과가 있는 거 알아? 이 정도면 나 완전식품 아니야? 앞으로는, 그리고 뒤로도, 개밥의 도토리라든가, 도토리 키 재기라든가 이런 기분 나쁜 말 함부로 내뱉지 마. 

미국 사람들은 우리 도토리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보지만 그렇지 않아. 고대 그리스인들로부터 미국의 토박이 사람들까지 전 인류가 한때, 혹은 지금도, 도토리를 주식으로 삼았었다구. 켈트족이나 스칸디나비아 인들은 도토리를 문양으로 사용했고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도 도토리 문양이 있어. 도토리가 영국철도와 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상징물인 거 몰랐지? 참나무 원목 가구, 아니 이것도 영어로 하면 더 고급지게 들리니까 오크(oak) 원목 가구 좋아하지? 고기는 참나무 숫불구이가 더 낫고, 버섯은 참나무에서 기른 것이 더 고급이고. 이루 말할 수가 없다니까. 이게 다 도토리잖아. 참나무가 도토리나무냐고 묻지 마. 무식하단 말 들으니까. 600종도 넘는 우리 일가친척들은 여러 이름으로 여러 모양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너희 인간들을 위해 ‘홍익인간’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거 알아줬으면 좋겠어.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orugo4u@gmail.com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10년 만에 딸아이와의 동거가 시작되고... 2020.02.03
딸아이가 2008년도에 대학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학(아랍 히스토리)을 졸업한 후 일을 시작하다가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마친 후 고등학교에서..
2020년도 H-1B [1] 2020.01.30
올해 H-1B 신청에도 몇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래 자세히 설명해 드립니다.사전 Registration 올 H-1B 신청의 가장 큰 변화는 사전 registr..
[ 오르고의 횡설수설 7 ] 도토리 가라사대 2020.01.27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보다 더 내 심정을 딱 짚어낸 시가 또 있을까? 안도현 시인 만세. 근데, 넌 누구..
21세기의 궁합(宮合) 2020.01.27
신년을 맞는 이맘때가 되면 한국의 웹 지면에서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이나 「궁합(宮合)」의 홍수를 만난다. 그 옛날에는 궁합(宮合)은 혼인을 앞둔 양갓집에서 신..
한담객설閑談客說: 퇴고와 황당 2020.01.27
어느새 라는 말을 실감한다. 엊그제가 정초였는데, 내일모레면 다시 설날이다. 경자庚子년이 시작되고 새해를 맞는 거다. 쥐띠의 해이며, 1960년생들은 환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