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객설閑談客說: 첫눈 오는 날 만나자
보스톤코리아  2018-11-26, 10:32:38 
고등학교 적인가. 국어시간에 읽었다. 수필 백설부白雪賦 첫 머리이다.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雪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김진섭, 백설부 중에서)

아내와 연애 할 적이다. 무수히 많은 편지를 날려 보냈다. 편지는 이-메일이 아닌 손글씨였다. 만나고 와서도, 다시 엎드려 써서 보낸거다. 아내도 받는 맛을 알았다. 간혹 거르는 날이 있다면, 은근히 불평하곤 했더랬다. 왜 편지를 보내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편지는 이따금 타자기로 쳐서 보내기도 했는데, 꽃봉투는 아니었다. 너무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이번 졸문은 아내에게 띄우는 백설부白雪賦이다. 

몇년 전 이즈음 이었다. 교회 예배후 점심을 겸해 몇분 장로님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창문을 통해 본 보스톤 거리엔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른 첫눈이었다. 아련한 첫눈 기억이 떠오르는 듯 슬쩍 내려왔다. 오광수 시인이다. 

빨간색 머플러로 따스함을 두르고
노란색 털 장갑엔 두근거름을 쥐고서
아직도 가을색이 남아있는
작은 공원이면 좋겠다.
(오광수,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중에서)

수 십년전이다. 12월 초쯔음 되었을 거다. 예그린 다방이었다. (다방이름이 예스럽지 않다. 종로1가와 2가가 만나는 종각 뒷편에 있었다.) 그곳에서 여자아이를 만나기로 했다. 집을 나설 적에 하늘은 흐린듯 눈발이라도 내릴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방에 도착할 즈음엔 함박눈이 소복히 쌓였다. 눈발은 그칠 생각도 없는듯 했다. 첫눈이었고, 데이트하기에 더없는 행운이었다. 분명 여자아이는 빨간색 목도리에 노란색 벙어리 장갑을 끼고 나올 것이었다. 첫눈과 어울리는 복색일테니 말이다.

다방안은 시끌했고, 붐볐다. 곰팡이 냄새와 커피냄새와 담배연기가 뒤섞여 있었고, 빈 자리가 없었다. 저마다 첫눈을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걸친 내게, 내 데이트 상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초조하게 빨간색 목도리를 기다릴 적에, 시간이 흘렀다. 공중전화 부스 긴 줄 끝에 섰다. 전화를 걸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차례가 돌아왔고, 여자아이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돌아온 대답이다. 집을 나간지 한참됐다. 

나중에 알았다. 버스가 눈속에서 비탈길을 오를 수없어,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로맨틱할뻔 했던 눈내리는 날 데이트는 허망하게 갔다. 첫눈이 데려간 거다. 만나기로 했던 여자아이는 지금 내 아내다. 

보스톤에서 눈은 지겹다. 하지만 첫눈은 여전히 반갑다.  올해 첫눈은 밤에 내렸다. 비와 섞여 그닥 낭만스럽지는 않았다. 다음번 눈이 올적엔 아내와 밖에서 커피라도 마셔야 겠다. 첫눈 오는날 우리 만나자.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요한계시록 1:14)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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