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객설閑談客說: 넉넉히 아프다
보스톤코리아  2018-11-12, 11:05:16 
언젠가 인용한 적이 있다. 로마인 이야기. 역사학자들은 이 책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했다. 정통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소설이 아닌데, 그렇다고 전문서적도 아니다. 역사적 사실史實이 작가의 생각과 뒤섞여 있다. 하지만 책은 편하게 읽힌다. 책엔 형용사와 부사가 자주 등장한다. 

책을 많이 읽으시나 봐요? 이따금 받는 질문이다. 답할 말이 없어 허둥댄다. 하긴 한동안, 페이퍼백 영문소설을 읽기는 읽었다. 죤그리셤의 법정法廷소설이다. 몇권을 읽었나 기억할 수없고, 세어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책은 술술 읽혔고, 재미가 쏠쏠했다.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병원에 갔을 적이다. 벽에 붙은 그림에 눈이 갔다. Pain scale. 통증강도强度? 정도로 해석될 게다. 재미있기에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견딜만한지. 약간 아픈지. 무지 아픈지. 죽고 싶도록 아픈지? 상처와 아픔이 숫자로 표기될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판사의 판결문은 모두 딱딱하다. 인문人文이 끼어들 틈이 없고, 허락치도 않는다. 범법사실이 명징하면, 법은 추상같아야 하기 때문일 게다. 그럴적에, 죄는 형량刑量으로 정량화되고 숫자로 표시된다. 한국 전前 대통령의 재판에서 판사의 판결문 한 대목이다. ‘피고인이 다스의 실소유자이고 비자금 조성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넉넉히 인정된다.’  넉넉히 라는 말에 눈길이 갔다. 문외한인 내게 생경했기 때문이다. 넉넉하다는 말은, 용돈이 넉넉하다. 식량이 넉넉하다. 뭐 이런 데 쓰는 말 아니던가. 매우 긍정적인 표현 아닌가해서 의아했던 거다. 판결문을 소설처럼 여긴 건 아닌가 그게 걸린다. 

판결을 듣는 피고인은 무척 억울하다 싶어 아팠을 것이다. 그의 통증스케일은 최고치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 차라리 눈을 감았을 것이고, 심한 통증이 밀려들었을 게다. 아픈 상처되었을 터. 정연복 시인이다. 

아픈 상처를 감추지 말자 
상처가 있어 
비로소 사람인 것을 

상처는 상처와 어울려 
아물어 가는 것 
(정연복, 상처 중에서)

임어당의 말이다. ‘교양있는 사람은 사물을 옳게 받아들여 사랑하고, 옳게 미워하는 사람’. 옳게 사랑하고 옳게 미워하라!  하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걸 강도强度나 숫자로 표시할 방법은 없을터. 단지 넉넉히 사랑하고, 넉넉히 미워해야 하나보다. 넉넉하다는 말은 형용사인가?

법은 준엄峻嚴한데, 듣는 사람은 넉넉히 참담慘憺하다.

종이 주인만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마태 10:25, 공동번역)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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