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디는 방식(8)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09-17, 14:42:04 
은미가 처음 남자를 만났던 그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제라니윰 꽃이 소복하게 올라와 있다. 제라니윰 잎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살짝 비비면 약간 비릿한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냄새라고 남자가 말했었다. 제라늄 잎을 엄지와 검지로 두어 번 비비고 냄새를 맡아 본다. 그때 딸랑! 문 여는 소리 들리고 그가 들어왔다. 남자가 은미를 한참 보다가 처음 만났던 그날 두 개의 테이블 건너편에 앉는다. 그리고는 계속 은미를 바라본다. 은미도 그를 바라본다. 은미가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남자가 은미를 따라 나간다. 둘은 좁은 골목을 두어 발자국 걷다가 은미가 먼저 돌아선다. 우산을 받고 있을 기운도 없다. 우산을 내린다. 남자가 다가와 은미를 안는다. 때로는 어떤 말보다 강한 몸짓 하나로 전류에 감전되듯 상대와 감정이 교류되기도 한다. 꽂힌다. 이 말은 그런 감정을 잘 설명한 말이다. 꽂히면 다 소용없이 상대의 표정과 손짓 발짓에 무너진다. 그런 것을 화학 작용이라고 가벼운 말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 화학 작용은 그리 가볍지 않다. 모든 예술의 주제는 생로병사에서 비롯되지만 유일하게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만큼 광범위하게 감정의 폭을 갖고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한 반에 60명이 넘게 되었던 그 시절의 서울 외곽 의정부, 그곳의 아이들은 거반 그런 삶을 살았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위의 세 오빠들도 나보다 나았다고는 할 수 없다. 모든 옷을 물려받았던 막내 오빠는 한 번도 새 옷을 산 적이 없다고 했다. 큰 오빠는 한 번도 제 몸에 맞는 옷을 산 적이 없다고 했다. 둘째 오빠는 늘 중간에서 눈치를 봐야 했다고 했다. 이러한 각자의 열등감은 자신의 존재감이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따뜻한 추억이 되거나 불행의 전초전이 되거나 한다. 현재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과거의 시간이 갖고 있는 색깔이 달라진다. 유화는 실패라는 것이 없다. 색깔이 다 마를 즈음 다시 덧입혀 색을 칠하면 감쪽같이 지나간 색과 시간이 감춰진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색깔을 바꿔 칠할 엄두를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아무리 결심을 해도 삶의 습관도 관성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열등감을 나이가 들어서도 갖고 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기나 한가? 거의 없다.

사람들의 열등감이란 현재의 피난처로 늘 재생 복구된다. 난 대학을 포기하고 드라마를 쓰기 시작하면서 드라마 속에서 내 마음껏 나를 표현했다.
피아노를 갖지 못해 연습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성장기를 거친 피아니스트의 비틀린 사랑,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호텔에서 요리하다가 주방장이랑 연애하다 출세를 위해 배신하는 상투적인 이야기, 할머니 세 명이 노인정에 앉아 도란 도란 나누는 청춘 이야기 등등 꽤나 많다. 나의 열등감은 드라마 속으로 다 흘러 들어갔다. 사람들이 말하는 막장 드라마도 서슴지 않고 썼다. 내 나름대로 사람의 모든 감정을 존중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과가 매번 좋은 건 아니었다. 나는 열등감이 남아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몹시 짜증 나고 불편하다. 아니 열등감이 있는 것을 까발려 보여 주는 사람들은 오히려 낫다. 열등감을 그럴듯한 언어를 빌려다 포장하는 사람과 만나면 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해진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대화가 불가능하다.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는 사람의 90%는 그 감정에서 벗어난 사람이니 오히려 대화가 상쾌하다.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에 휩싸여 자신을 괴롭히는 삶을 살다가 오십이 훌쩍 넘은 어느 날, 거울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서른의 고비, 마흔의 고비는 비교도 되지 않게 몰락하고있는 몸뚱어리를 보게 되고 느끼게 된다. 남자나 여자나 그 시기가 되면 자신이 갖고 있던 열등감도 역동적인 젊음이 내뿜는 감정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것을 놓아주어야 하는 오십 이후의 세월을 살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고 너무 어이없이 다 놓아버리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도 있다. 둘째 오빠는 결혼에 실패한 모든 이유를 형과 동생 그리고 아귀 같은 여동생인 나 때문에 그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고 살았다고 말한다. 늘 직장에서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전전하던 결혼 8년 되던 크리스마스이브 날, 오빠의 아내는 아이만 덜렁 업고 나가 버렸다. 4년 뒤에야 아이를 보고 싶으면 오라고 연락이 왔다. 오빠의 아내는 이미 오빠와 살던 그 여자가 아닌 전사처럼 강한 모습으로 시장통에서 살아내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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