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디는 방식(6)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09-03, 10:34:52 
은미의 화술은 막힘이 없다.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어디에나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입사 후 6개월 만에 대리가 되는 획기적인 일이 있었지만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은미는 회사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영어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은미에게 서른을 목전에 두고 남자가 생겼다. 영어 회화를 공부할 때 늘 퇴근 후에 학원 수업을 들으려면 1시간정도 기다려야 했다. 그때 가던 찻집에는 그 시간에 꼭 오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가 말을 먼저 건넨 것도 아니었다. 약간 장발에 허수룩한 옷차림 그리고 형형한 눈빛, 그게 그 남자의 인상착의다. 은미가 자신을 단련하느라 고생 한 것을 보면 그런 남자를 좋아할 리가 없지만 은미는 그 남자에게 먼저 다가섰다. 테이블을 두 개 건너뛰어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은미가 말했다.

“여기 매일 오시네요?  전 학원 수업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 매일 와요.”
“전 요 앞 카페 인테리어 하는 사람이에요. 끝나고 집에 가야 하는데 여기서 맥주 한 잔씩 꼭 하고 들어가게 되네요. 여기 테이블의 나무 냄새가 맥주 냄새하고 아주 잘 어울려요.”
“그래요?  전 몰랐어요.”
은미가 테이블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자 나무 냄새가 진짜로 났다.
“테이블을 만드는 나무는 주로 레드오크, 화이트 오크, 애쉬, 체리, 메이플, 월넛 이렇게 여섯 가지의 나무를 쓰죠. 이 테이블은 체리나무에요. 주인이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나무의 결을 잘 살려 그저 테이블 역할만 하게 만들었죠. 아무런 현대적 디자인 없이, 화공약품을 하나도 쓰지 않고요. 이런 테이블은 오래가지 못하죠. 하지만 그것도 현대적 감각에 익숙한 사람의 기준이고 집 주인은 나무가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그 모양을 디자인의 한 형태로 볼 줄 아는 감각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아요.”

남자가 테이블에 대해 한참 이야기할 때 은미는 저 건너편에 앉은 남자에게 손짓으로 와서 앉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남자는 말을 계속하면서 은미 앞에 앉았고 그날 은미는 학원을 빠지고 남자와 세 시간을 앉아 이야기 나눴다. 세 시간 동안 은미 앞에 앉은 남자는 쉴 새 없이 이야기했고 은미는 듣는 쪽이었는데 은미는 그 남자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유쾌해서 계속 깔깔거리고 웃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마음이 가면 우선 웃는다. 아무 이야기나 해도 웃는다. 그저 웃는다. 남자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학교도 못 마치고, 취직도 못 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까지도 국가의 감시를 받고 있고 선배와 인테리어 사업을 하며 겨우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 남자가 쓴 글이 운동권에서는 필독서가 되어 있었다. 그 남자는 운동권에서는 영웅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제 밥벌이나 겨우 하고 장래도 불투명한 이 시대의 불운한 청년일 뿐이다. 은미의 집 전화벨이 울리고 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은미야 큰일 났어. 나 아는 선배가 대마초를 피우다 검거되었는데 선배와 연결된 사람들을 지금 다 조사하고 있나 봐. 난 대마초를 안 해서 걱정없지만 우리 집에는 운동권의 조직도가 있어.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책들은 내가 지금도 감시 대상이니까 내 문제로 끝나지만 조직도가 그들에게 넘어가면 안 돼. 그걸 빼내 와야 해.” 

다급함과 두려움이 서려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은미는 이 남자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가 알려 줄 테니 네가 가서 빼내와. 그곳은 개미굴 같은 집이라 집 앞에 형사들이 있어도 네가 어느 방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거야. 가면 왼쪽으로 방들이 쭉 있는데 맨 끝에 계단이 있어 그곳으로 올라가면 이층 오른쪽으로 네 번째 방이야”

남자는 자물쇠 번호와 조직도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 주었다. 은미는 조퇴를 하고 안국동으로 향했다. 사랑하게 될 수도 있는 남자의 방 안에 서서 그 남자가 살아온 길을 살펴보았다. 은미는 자취를 하면서도 취사도구가 전혀 없는 남자의 좁은 부엌을 살펴보았다. 책꽂이에 빽빽하게 채워진 책들의 제목 속에는 은미가 듣기만 했던 막스, 자본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 독재 이런 단어들만 경직된 표정으로 꽂혀 있었다. 그중 황순원 단편집을 빼냈다. 책 갈피에 빼곡한 이름이 별칭인지 암호인지 모를 말들로 적혀 있었고 그중 까마귀가 있었다. 그 남자의 말이 생각났다.
다음 호에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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