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빛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04-16, 13:12:55 
오늘은 바늘로 A4 용지에 몇 개의 구멍을 뚫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날이다.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만 제외하고 구멍을 뚫기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까? 오래 걸릴 것 같았지만 딱 한 시간 반이면 되었다. 남편은 은행 갔다가 마켓에 들러 우유와 밀가루 그리고 포도를 사 온다고 했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세 시간 정도 걸린다. 남편이 적어놓은 리스트에는 여러 가지 실험이 있었지만 세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중 이 실험은 준비물도 간단하다. 세 시간을 보내기에는 딱 맞는 실험이다. 구멍을 뚫기 시작하면서 잡념도 사라졌다. 실험의 리스트는 156가지가 있었다. 3년을 살며 거의 해 보았고 실험의 과정과 결과는 기억되었다. 처음에는 78가지였는데 남편이 계속 개발하여 추가로 써넣었다. 안 해 본 것 중 하나, A4 용지에 바늘로 구멍 뚫어서 한 장의 용지에 커다란 구멍을 내는 이 놀이를 고른 것이다. 구멍을 내는 동안 창문의 유리를 관통하여 거실로 스민 빛 속에서 먼지들이 춤을 추는 것을 가끔 고개 들어 보곤 했다.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먼지는 바닥에 앉지 않으려고 량의 들숨과 날숨을 타고 눈앞에서 부유한다. 실험을 끝낸 후 남편이 돌아오기까지 량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 덮인 아파트 앞을 지나간 사람은 7명, 다람쥐 세 마리, 아래층 고양이가 잠시 주인 따라 나왔다가 들어가는 소리가 남은 한 시간 반 동안 있었던 일이다. 이 정도면 밖이 꽤 분주한 것이다. 이 시골 마을에 들어온 후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다. 밖에 있는 시간보다 집 안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서 계절이 몇 번 바뀌었는지는 별 의미가 없다. 밖은 넓은 미국 땅이지만 량에게는 좁은 중국의 집과 같았다. 하루 종일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던 날도 있었다. 그동안 고향의 상하이 골목을 떠 올리며 엄마, 친구 그리고 이혼한 남편 그리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엄마를 어려서부터 남처럼 여기는 아들이 차례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량의 등에 열이 차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진행되면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등 아래쪽부터 위로 서서히 열이 꽉 차오르면 손이 떨리고 눈을 깜박거리고 허기와 추위가 동시에 몰려오기 시작한다. 잡고 있던 정신의 끈이 툭 끊어지는 느낌을 뇌혈관에서 느낀다. 량은 심호흡을 시작한다. 새로운 땅을 밟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던 안식은 없었다. 량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 조금만 더 긴 실험을 선택할 걸 그랬다. 생각이 생각이 물고 나오지 못하도록….’ 량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아파트 문 여는 소리가 오른쪽 복도 끝에서 난다. 신발을 꺾어 신고도 앞 발을 먼저 놓는 남편의 특이한 발자국 소리다. 거짓말처럼 량의 등에서 열이 비워져 가고 곧 안정을 돼 찾았을 때 현관 문이 열렸다.
“별일 없었지?” 
남편이 묻히고 들어온 차가운 공기에서 냄새가 난다. 바람 냄새는 살짝 비리다. “네”라고 짧게 대답하고 수프를 데우려고 스토브의 불을 켰다.
남편이 소파에 기대어 TV를 켠다. 굽어져 가는 등의 척추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순간 눈을 찡그렸다. 머리카락도 거의 없다. 남편의 꼼꼼한 성품이 듬성듬성해 지고 있는 몸의 여백을 대신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그의 몸짓은 매 순간 계획적이다. 남편은 량의 공황장애 극복을 위한 계획을 치밀하고 세밀하게 세웠다. 하루 24시간의 계획표는 늘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량은 그런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 대신 고요한 살의를 느끼고 있었다. 수프가 냄비 바닥에서 눌어붙고 자글거리며 타 들어가기 직전에 남편이 척추를 비틀어 량을 바라보았다. 량은 남편의 표정을 보자 아무것도 못 한다. 때로 저 사람이 나의 실수를 지적하면서 밟아버리려는 것인지, 실수를 바로잡아 주고자 하는 것인지 잘 분간이 안되었다. 그의 표정은 량을 밟고 있었고 목소리는 바로잡아 주고자 했다. 저벅 저벅 걸어와 불을 끄고는 량의 얼굴 가까이 그의 얼굴을 디밀고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렸을 때서야 량은 단 20초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머릿속에서 정리 정돈되었다. 수프는 누린내가 나서 먹을 수 없었다. 다시 수프를 끓이려고 할 때 남편이 필요 없으니 옆에 와 앉아 뉴스나 같이 보자고 한다. 남편이 손을 만지작거리며 뉴스를 본다. 한없이 다정한 남자의 얼굴을 량은 한 번도 마주 보지 않고 TV에 눈을 고정하고 손만 그에게 맡긴다. 그가 서서히 량의 엉덩이와 가슴으로 손을 옮기자 그녀는 그제야 다정하게 그의 얼굴을 마주 본다.
“잠깐만... 나 베란다에 차 끓이고 있는데 어느 정도 되었는지 좀 보고 올게요.”
량은 남편이 깨어있는 동안에는 그를 피해 뭔가 핑계를 댈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집 안에 장치해 놓는다. 빨래 돌리기, 차 끓이기, 곰국 끓이기, 행주 삶기 등등의 일들을 시간 사이사이에 끼워 놓고 늘 그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벗어날 여건을 구석구석 마련한다. 량이 하는 모든 방법은 모두 중국식 방법이라 남편은 종종 짜증을 낸다. 말을 못하는 량은 인형처럼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모로 꼬고 남편 옆에서 부닌다. 강아지처럼 부닌다. 량은 남편의 계획이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인지 금방 파악되고 대처할 방법을 찾기에 시간도 넉넉히 주어진다. 아무리 치밀하고 세밀해도 그의 나이는 칠십을 넘어섰다. 그러나 지금은 숨죽이고 기다려야 한다. 량이 남편을 벗어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과 남편이 량의 무료함을 위해 개발한 놀이의 숫자는 거의 비슷하다. 아무리 량이 머리를 써도 밤은 다가오고 량은 번번이 그의 품 안에서 돌처럼 굳어진 자신을 향해 은밀하게 돌진하는 늙은 페니스에 속수무책이었다.
량은 아주 총명한 계집아이였다. 늘 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다만 버릇없고 당돌한 아이로 불렸다. 너무 깍듯해서 답답한 도덕관과 사회주의가 꽉 조인 옷을 입은 것처럼 목을 조여왔다. 그런 사회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사고는 위험했다. 량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동창생과 사랑에 빠져 섹스를 나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임신으로 이어지고 결혼으로 연결되는 과정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야 량은 자신의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이 땅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구속력으로 돌아왔는지 알았다. 아이를 지울 수도 없고 어린 남자는 생계에 대책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임신이 량을 불안하게 했다. 량은 세계 곳곳의 풍경 사진을 모으며 그 풍경 속을 걷는 자신을 생각했다. 옷은 무엇을 입고 신발의 색깔은 어떤 것으로 하는지를 상상하는 동안 량은 소녀였다. 임신이 상상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시작됐다. 빛이 불러내는 기억의 입자들이 커다란 동굴을 만들고 고요하게 입을 벌리며 다가왔다.
 (다음 호에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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