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10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1)
보스톤코리아  2018-01-22, 11:32:24 
문노는 신라시대를 통틀어 631년에 난을 일으켰다가 9족이 멸문지화를 당한 박칠숙과 함께 격검술擊劍術에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수많은 무인, 무사, 화랑도들이 저마다 신출귀몰하듯 무예의 기량를 발산하며 명멸했던 시대속에서 그들은 최강자로 각인되어 전해오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수 많은 무인들이 그때마다 당대의 역사를 장식하면서 출몰하였다. 심지어 왕 위에 군림하면서 나라를 직접 다스린 기간만도 100년이나 된다. 조선시대 역시 수 많은 출중한 무예가들이, 비록 문신들에게 밀려서 은둔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기예로 국방에도 일조하였고, 자신만의 무기武技를 후예들에게 전수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무사가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무사 백동수다. 그는 조선의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에게서 조선검법을 전수받았다. 

먼저 고려사절요를 참고해서 고려 무인시대 100년을 통치한 무인들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공부한 문신들에 의해 씌여진 사서이다. 무인시대의 역사적평가는224) 잠시 보류하고,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만 서술하려고 한다. 무인들이 집권한100년간의 많은 역사가 기록되어 전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당시의 ‘허수아비’ 왕들과 실권자들만 간단히 편년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1170년 일어난 ‘무신의난’으로 집권한 무인들은 1270년까지 정확하게 100년간 왕 위에서 군림하였다. 초기 30여년은 무신들끼리 함께 또는 돌아가면서 권력을 잡았고, 다음 60여년은 최씨 일가의 집권이었으며, 나머지 10여년은 이미 고려 왕실이 몽고에 투항한 뒤 김준과 임유무가 사실적으로 유명뮤실의 무신정권을 다스렸다. 1170년(고려 의종 24년)에 이고, 이의방, 정중부 일파가 보현원에서 구테타를 일으켜 의종을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명종을 즉위 시켰다. 그리고 실권을 잡은 그들은 초기에는 중방에서 협치의 정치를 하다가 이고가 왕이 되고파 반역을 꾀하다가 제거되었다. 그리고 정중부를 전면에 세우고 실권은 이의방이 잡았다. 1173년에는 문신 김보당이 의종을 복위시키려다 이의민에 의해 제거되었고, 이때 의종도 죽임을 당했다. 이름이 비슷한 이의방과 이의민은 형제도 친척도 아닌 아무런 관계가 없다. 1174년에는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지만 제거 당했다. 그리고 동년에 정균(정중부의 아들)이 이의방을 피살하면서 정중부가 실권을 잡았다. 1176년 ‘공주 명학소의 난’, 즉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다.

이렇게 각지에서 일어나는 난을 진압하고 나서는 그 역시 권력과 탐욕에 몰입하게 되는데 아들과 사위가 더 망나니 짓을 했다. 아들은 공주들을 겁탈했고 사위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치부하였다. 그렇게 민심이 이반되자 1179년에 경대승이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잡았다. 하지만 경대승은 집권 4년만에 30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런데 상당히 의아한 부분은 고려사에 보면 ‘무인정권’ 100년 동안 정권을 잡았던 실권자들이 모두다 ‘역적열전편’에 실려 있는데 경대승은 유일하게 ‘신하열전편’에 실려있다. 무신정변으로 무너진 왕조질서를 회복하려했던 그의 노력이 아마도 인정을 받은것 같다. 그는 사실 명종과 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군사훈련을 하여 경비에만 전념하는 ‘도방’에서 머무르면서 ‘중방’ 정치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모든 권력은 그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죽자 그가 앉아 있었던 무소불위의 권좌에 지나치게 큰 공백이 생겼다. 무신정권을 종식하고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하지만 명종은 그 자리에 이의민을 불려 들렸다. 

224) 무인정권에 대한 평가는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무인시대가 끝난 후 충선왕이 이제현에게 “왜 초기에 진압하지 못했는가?” 라는 물음에 “경대승이 죽고 나서 명종이 이의민을 불러드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보현원 구테타’가 일어난 원인도 왕과 문신들이 제공했듯이, 아마 당시 명종도 이의민을 불러드려야만 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무신정권이 망한것 또한 무신들의 폭정과 무능으로 그 빌미를 제공하였다. 고려사에 기록된 조선시대때 한 평가는 왕실은 철류(깃대에 달린 술)에 비유했고 심지어 고려 신종을 목우인(나무인형)으로 표현했다. 당시는 정규군(500여명 있었음)이 없었고 무인들의 사병만 존재했으며, ‘무인이 설치면 나라가 망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과연 무인 설쳐서 조선시대에는 미증유의 임진왜란, 국왕이 항복를 했던 병자호란이 있었으며, 결국 나라를 잃는 ‘경술국치’가 있었던가? 조선이 부강하지 못했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문신들이 서로 죽인 4대 사화를 비롯하여 그 4대 사화를 합친거 보다도 더 많이 죽어나간 ‘기축옥사’, 그리고 3번의 ‘환국’, 그 외 다수의 크고 작은 사화와 옥사들, 후기의 종교박해로 인하여 남인들을 위주로 죽임을 당한 수만명의 선비/백성들로 인하여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도륙당했기에, 인재는 모두 사라지고 ‘망국지신’들만 조정에 남았으니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0년대 부터 무인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조금씩 나타났다. 대몽항쟁으로 외세에 저항하면서 자주적 시대를 펼치려고 노력했던 면이 부각되었고, 팔만대장경도 이 무렵 초판되었다(1236년). 1960년 부터는 삼별초의 활약상이 대두되었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쓰여진 고려사의 무인정권은 무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면이 더 부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최씨 무인정권은 사실 문신들을 많이 등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약한 문인들은 힘을 못썼다. 무인들만 탓할 수 있을까?(최씨 정권 동안 과거시험의 횟수가 다른 왕들의 치세보다 더 많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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