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22. 두 인디언과 두 백인 (1)
보스톤코리아  2017-01-09, 15:06:35 
인디언 역사에서 꼭 소개해야 할 사람이지만 본문 중에 적절한 위치를 찾지 못해서 빠지게 된 네 사람을 여기 따로 하나의 장을 만들어 소개하고자 한다.

파커(Ely Samuel Parker)
파커(Ely Samuel Parker)는 세네카(Seneca) 인디언의 순수혈통으로 1828년에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커는 기독교학교에서 정통교육을 받았으며 영어와 세네카 말을 둘 다 구사할 수 있어서 백인과 세네카 부족 간의 간극을 메우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852년에는 세네카의 대추장(Sachem)으로 추대되어 이로쿼이족의 전통가옥인 롱하우스의 서쪽 문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도네호가와(Donehogawa)라는 이름을 받았다.

1840년대에 파커는 젊은 변호사이자 인류학과 사회개혁에 관심이 많은 모건(Lewis Henry Morgan)을 만나게 되어 서로 간에 도움이 되는 절친한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특히 모건은 이로쿼이 연맹(League of the Iroquois)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었는데 파커를 통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파커는 미국시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변호사로의 진출이 막히게 되자 모건의 도움으로 기술학교로 진학하여 토목공학을 전공하였다. 일리노이에서 정부공사 감독관으로 일하던 시절에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을 만나 둘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파커는 이로쿼이 자원병 연대를 이끌고 북군에 합류하기를 원했으나 뉴욕 주지사의 반대로 무산되자 본인만이라도 토목장교로 참전하기를 희망하였지만 이마저도 군 당국에 의하여 거절되었다. 마침 토목전문가를 찾고 있던 그랜트 장군이 특별히 파커를 대위 계급을 주어 입대시켰다. 파커의 성실성과 능력을 알아본 그랜트는 그를 부관으로 활용하였고 나중에는 정식 비서로 활용하였다. 그랜트가 있는 곳에는 그림자처럼 늘 파커가 있었다. 1865년 4월에 작성된 남군 총사령관 리(Robert E. Lee) 장군의 항복문서 초안도 파커가 작성하였다. 항복식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리 장군이 파커와 악수하면서 “여기서 진짜 미국인을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자 파커는 “우리 모두가 다 미국인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파커는 준장으로까지 진급하였다.

그랜트가 대통령이 되자 그는 인디언에 대하여 평화정책(Peace Policy)을 추진했다. 이 정책 추진에는 파커가 최고의 적임자라고 생각하여 그를 인디언담당국장으로 임명했다. 1869년부터 국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에 백인들로부터 끈질긴 모함과 인종차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인디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오래 버틸 수 없어 1871년에 결국 조기 사임하였다. 그의 재임시절 이야기는 디 브라운(Dee Brown)이 그의 불후의 명저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에서 한 장(chapter)에 걸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디 브라운의 그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라는 제목으로 번역판이 나와 있다.

찰스 이스트만(Charles Eastman) 부부
찰스 이스트만은 1858년 2월 19일 미네소타에서 산티 다코타 아버지와 백인 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신자가 된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 썼는데 이스트만은 다트머스 대학과 보스톤대학교의 의과대학원을 졸업하여 인디언 최초의 내과 의사가 되었다. 사우스다코타에 있는 파인릿지와 크로우크리크 인디언보호구역에서 인디언담당 의사로 근무하였다. 그가 근무하는 동안 운디드니 대학살사건이 발생하여 수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인디언보호구역에서의 근무가 끝난 후 개인병원을 차렸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의 부인이 된 엘레인(Elaine Goodale Eastman)은 동부의 명문 여자대학 스미스 칼리지를 졸업한 재원으로서 15살에 시집을 낼 정도로 남다른 문학적 재주를 가지고 있는 백인 이민자의 딸이었다. 그녀가 운디드니 사건이 있던 무렵에 그 지역 담당 교육감독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대학살로 부상을 입은 인디언들을 돌보면서 찰스와 가까워져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두 부부 사이에서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부부는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나온 후 잠시 칼라일학교에서 일하기도 하였고 찰스는 인디언협회(Society of American Indians) 창설멤버로도 활약했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에 엘레인은 찰스에게 인디언에 관한 글을 쓸 것을 권유하였다. 1902년 찰스는 그가 15세까지 다코타 인디언으로서 살아온 경험담을 엮은 책 ‘Indian Boyhood’를 발간하였다. 그는 그 뒤에도 열 권의 책을 더 집필하였다. 찰스는 인디언의 문화와 역사에 관하여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찰스의 책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고 한다. 저술뿐만 아니라 찰스는 전국을 돌며 인디언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기 위하여 일 년에 25번씩이나 강연회를 열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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