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파크스
보스톤코리아  2016-12-05, 11:51:41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흑인 여성 재봉사 로자 파크스는 퇴근길 버스에서 앉아 있던 자리를 백인 승객에게 양보하라는 버스기사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녀는 버스기사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 되었다. 그녀는 그날 밤 풀려났지만, 이날의 사건은 1년여에 걸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촉발 시켰다. 대법원은  결국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2005년 타계한 로자 파크스는 오늘날까지 미국 인권운동의 어머니로 기억되고 있다. 

깨어 있는 시민 
61년 전 오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만든 주인공이 로자 파크스였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물론 그날 그 시간 제임스 블레이크가 운행했던 그 버스에 로자가 탑승했고, 자리에 앉지 못하는 백인 승객이 있었으며, 로자 그녀가 다른 자리가 아닌 유색인종 좌석의 제일 앞에 앉아있던 모든 일들은 우연히 발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좌석 양보 요구를 받아든 로자 파크스가 이를 거절한 일이 결코 우연이었을까?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이전에 그녀는 누구였을까?

로자 파크스 (본명은 로자 루이즈 매컬리)의 가정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고 알려졌다. 11세부터 Alabama State Teachers’ College for Negroes 부설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가정 형편상 학교를 그만두었다. 1932년, 로자는 10세 연상의 레이먼드 파크스와 결혼을 했다. 레이먼드는 로자가 고등학교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독려했다. 
레이먼드 파크스는 오랜기간 유색인종지위향상위원회(NAACP)의 멤버였고, 이후 로자 역시 NAACP의 활발한 멤버가 되었다. 1943년무렵부터는 NAACP 몽고메리 지부의 비서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알려져있다시피 당시의 남부는 짐 크로(Jim Crow) 법이라고 불리는 흑백간의 인종 분리 정책이 흑인들 일상의 곳곳을 옥죄고 있던 때였다. 민권운동이 횃불처럼 타올랐던 시기는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이지만, 이미 1940년대 NAACP의 지도자들을 위시한 민권운동가들은 수정 헌법 14조가 명시한 <법앞에 평등>하게 보호될 권리를 핵심 기치로 활발히 활동했다. 로자 파크스가 미국내 흑인 차별문제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민권운동 활동가”였다는 사실이 로자의 “행동”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불의 
너무나 당연하게도 제임스 블레이크가 로자에게 좌석 양보를 요구했던 행위 역시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다. KKK의 활동이 버젓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공공시설에서 대중교통에 이르기까지, 당시 남부에서 인종 분리법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은 어디에도 없었다. 로자가 좌석 양보를 거부했던 “버스”의 경우 버스 기사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하며, 백인좌석은 앞쪽 그리고 흑인 좌석은 뒤쪽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흑인들은 버스 요금을 지불하고 백인 좌석을 거치는 것은 “백인 승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행위”로 간주가 되어, 흑인들은 버스 앞쪽에서 요금을 내고 뒷문을 통해 유색인종 좌석에 탈 것이 요구되기도 했다. 백인 좌석이 모자랄 경우 백인 기사들은 흑인들에게 좌석 양보를 요구하는 일도 일상적이었다. 로자 파크스는 “흑백 분리법 위반”을 이유로 체포되었고, 며칠 후 열린 재판에서 재판부는 로자에게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법정비용을 내라고 판결했다. 사실 애초에 그녀가 앉아있던 좌석이 유색인종석이었던만큼 엄밀히 말해 ‘관습법’을 어겼지 ‘흑백 분리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 남부 흑인들이 처한 현실은 한마디로 그지경이었다.  

훗날 그녀의 자서전 마이 스토리(My Story)에서 로자 파크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언제나 사람들은 내가 피곤했기때문에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신체적으로 피곤했던것이 아니다. 적어도 다른 날보다 더 지쳐있거나 했던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정말로 지쳐있던 것은... (늘 흑인들만이) 양보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지쳐있었다.”  

조직된 힘
그렇다면 몽고메리의 흑인 주민들이 한시간씩 걸어서 직장에 출퇴근하기도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를 일주일도 아니고, 한달도 아니고, 일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우연히 생겼을까? 로자 파크스가 체포되자 마자, “늘 한 인종에게만 피해와 희생을 강요하는” 불의한 법에 지쳐있던 흑인들이 보이코트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일까? 

로자의 체포 소식을 제일 먼저 접했던 사람들 중에 NAACP에서 로자와 함께 활동하던 철도 노동자 E.D. 닉슨이 있었다. 닉슨은 로자 파크스  재판이 있던 12월 5일에 맞추어 35000 부의 “버스보이코트>  유인물을 만들었다. 이를  흑인 학생들의 “통신문” 형태로 각 흑인 가정에 전달되도록 했다. 로자와 마찬가지로 부당한 대우에 지쳐있던 흑인들은, 버스 보이콧에 동참했다. 

여성 유권자 위원회 활동가들이 합류했고, 젊은 마틴 루터킹 목사가 주요 인물로 동참했다. 자가용이 없이 버스로 직장에 출퇴근하는 승객들 대부분은 흑인들이었던만큼 보이코트의 타격은 컸다. (때로는 흑인들을 고용한 백인 가정이 그들의 출퇴근을 돕기도 했고, 흑인 택시기사들은 이웃들을 무료로 출퇴근을 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마틴 킹 목사와  닉슨이 폭탄 위협등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몽고메리의 버스 보이코트는 전국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마침내 1956년 11월 대법원은 대중교통의 인종분리를 위헌이라 판결하였다. 매우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한 법 하나가 삭제되는 순간이었다. 


보스톤코리아 칼럼리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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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선생님의 지난 칼럼은 mywiseprep.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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