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뷰: 최악 그리고 최악
보스톤코리아  2016-11-21, 13:42:27 
“I am not a crook”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리처드 닉슨). 
1973년 11월 17일, 리쳐드 닉슨 대통령이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400여 명의 기자들 앞에서 약 한 시간 가량의 기자 회견을 가졌다.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중계된 이날 기자회견에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자신의 연관성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닉슨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실체이자 몸통이었다. 그날의 기자회견 이후, 닉슨의 거짓말을 덮기 위한 거짓말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결국 미국 국민들과 사법부, 그리고 측근들조차 닉슨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1974년 8월 8일,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닉슨의 사임 연설이 중계된다. “국외적으로는 평화를 위해, 국내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없는 번영을 위해서 매진해야할 시기에 대통령 개인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한 법정 싸움을 계속할 수 없어서" 물러나겠다고 했지만, 사실 탄핵되기 직전까지 벼랑끝에 몰린 닉슨이 사임을 선택한 것이었다. 돌이켜보건대 닉슨의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는 문장 자체가 사기였던 셈이다.

저로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지난 10월 25일, 지금 돌이켜보면 그조차 서막에 불과했지만 <박근혜 게이트: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베일이 벗겨지고 타블렛 PC 속 증거가 보도되고나서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라는 것을 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라는 말을 보면서 닉슨이 43년 전 오늘 전국에 중계했던 거짓말이 떠올랐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I am not fit for this office and should never have been here” (나는 애초에 대통령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 워렌 하딩)
재임기 측근들이 이러 저런 뇌물과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덕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히게 된 워렌 하딩이 했던 말이다. 하딩은 1차 대전 후의 사회적 불안과 적색공포를 등에 업고  “다시 정상으로"를 외치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하딩은 매우 비정상적인 ‘친구'들을 측근으로, 요직에 등용했다. 그 측근 중 재향군인회장은 퇴역군인을 위한 병원 건립 기금을 횡령했고, 또 내무부 장관은 와요밍주의 티팟 돔과 캘리포니아의 앨크 힐즈에 있는 연방정부 소유의 원유 저장소의 관할을 자신의 것으로 전환한 후, 사업가들에게 뇌물을 받고 임대했다. 심지어 법무부 장관은 미국이 1차대전 중 압류한 독일 재산을 반환하는 과정에서 부정을 저질렀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니 하딩으로서는 “나는 내 적들과는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젠장할> 나의 친구들은 나로하여금 밤에 잠못자고 서성이게 만드는 존재들이다"라고 괴로움을 토로할 법하다. (하딩은 “다시는 측근들로 인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연설했지만 그 연설을 실행하기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것도 객지에서.)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약 2주 전,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두 번째로 입을 열고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돌이켜 보니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듭니다.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한 세기 전 하딩 대통령 역시 측근에서 터지는 비리와 스캔들로 잠 못자고 괴로웠다.  “나는 대통령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라는 결점에 대한 고백만큼은 진정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하딩을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게 만든 1920년대의 부정 부패와 각종 뇌물 스캔들을 “스케일"로 비교해보자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그것에는 절대 미치지 못할 듯.  

하야하라
몇 년 전 이 지면에 <닉슨을 파멸시킨 것은 어쩌면…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내보냈다. 미국사 칼럼을 쓰면서, 다시는 대한민국 정치와 워터게이트를 연결시킬 일이 없기를 바랬더랬다. 언젠가는 이 지면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하딩을 추억하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더랬다. 그리고 다시는 대한민국 정치와 하딩 재임기의 부패 스캔들을 연관시키고 싶지는 않았더랬다. 순수한 마음으로 다양한 미국사의 장면을 소개하고 싶어서라는 마음 반, 또한 순수한 마음으로 대한민국 정치에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마음 반. 국정원의 지난 대선 개입 문제가 불거졌을때도, 2년전 십상시니 문고리 3인방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때도, 워터게이트니 하딩 행정부의 부정부패니, 혹은 그랜트의 스캔들이니 연관짓는 칼럼을 쓰고싶은 충동을 애써 자제했었다. 

하지만 지난 두 달에 걸쳐, 온 국민을 매일매일 새로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뜨리고 있는 <박근혜 게이트>를 접하면서, 미국 정치의 역사상 가장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는 워터게이트와 닉슨의 거짓말을,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히는 하딩을 애써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닉슨과 하딩을 넘어선 숱한 ‘최악'의 데자뷰가 있는 오늘, 한 국민의 순수한 마음으로 하야를 요구한다.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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