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8. 인디언을 말살하라 (2)
보스톤코리아  2016-09-12, 11:49:27 
인디언클레임위원회 (계속)
수년전부터 이러한 위원회의 설치 필요성에 관한 논의가 있어 왔으나 관련법 제정에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말살정책 도입을 앞두고 새롭게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인디언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는 것이 그들의 자립기반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말살정책 도입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동 위원회는 모두 370건의 사건을 접수하였는데 1978년 9월말에 미해결 사건들을 미국연방클레임법원(United States Court of Federal Claims)으로 이관하고 업무를 종료하였다.

인디언에 대한 사법권 행사
1885년 제정된 주요범죄법(Major Crimes Acts)에 의거 인디언의 살인, 방화, 강간, 절도 등 주요범죄에 대한 사법권은 연방정부가 행사하도록 돼 있었다. 주정부도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시범 케이스 성격의 법이 캔사스의 인디언을 상대로 1940년에 제정되고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몇 개의 다른 주에 대하여도 비슷한 법률이 만들어졌다. 1949년에는 캘리포니아의 일부 인디언 보호구역에 대하여는 형사사건은 물론이고 민사사건까지 주정부가 사법권을 행사하도록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1950년에는 뉴욕 주에서도 형사사건과 민사사건에 대한 사법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제정되었다. 다만 과거에 백인들의 술수에 속아서 많은 땅을 뺏겨 왔던 쓰라린 경험을 가진 인디언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토지분쟁에 관한 사법권은 동 법안에서 제외되었고, 이 법은 또한 인디언의 관습 인정과 면세 혜택, 사냥과 어업활동 허용 등은 계속된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1953년에는 제280호 공법(Public Law 280)이 제정되어 몇 개의 주가 추가로 말살정책 시행 대상이 되었으며 나머지 주들에 대하여도 원하는 경우에는 인디언보호구역에 대한 사법권 행사를 허용하였다. 동 법에 따라 많은 주가 인디언에 대한 사법권행사에 필요한 주법을 제정하였다.

인디언 이주지원법
1956년에는 인디언들이 인디언보호구역을 떠나서 직업을 찾아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하여 인디언 이주지원법(Indian Relocation Act)이 제정되었다. 동 법은 인디언보호구역에 대한 지원을 줄이는 반면에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확대함으로써 부족주권 말살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이 법이 제정되기 전에도 1950년에 나바호와 호피 부족을 대상으로 LA, 솔트레이크시티, 덴버 등 대도시로의 취업 이주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실시되었으며 이듬해부터는 인디언국이 이 프로그램을 다른 부족에까지 확대 실시하였다. 1955년에는 이주대상 지역으로 기존의 4개 도시에 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한 9개 도시를 추가하였다.  

동 법에서 규정한 이주비용 지원범위에는 이사비용, 편도교통비, 4주간의 생계비, 장비구입비용, 의료보험, 가재도구구입 비용, 작업복 구입비용, 직업교육 비용 등의 다양한 지출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때로는 주택구입시에도 지원을 받았다. 1960년까지 3만 1천명 이상이 인디언보호구역을 떠났으며 1980년까지는 그 숫자가 75만 명에 달하였다.
일부 인디언의 경우에는 도시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주 인디언들은 부족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새로 이사 온 도시에서는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정책의 희생자가 되기 일쑤였다. 부족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단순노동 일자리만 얻을 수 있을 뿐 직장 내 승진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도시에서의 주거비용과 생계비용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높아 고통스러웠으나 그렇다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리하여 인디언 이주지원법은 인디언 도시빈민이 양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자녀교육에서도 유무형의 인종차별로 인하여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말살정책의 폐해
1953년부터 1964년까지의 말살정책 시행기간 동안 100개 이상의 부족(Tribe) 또는 밴드(Band)가 부족주권을 상실하였으며 인디언 전체 인구의 3%에 해당하는 12천명은 부족민 지위를 포기하였고 1만 km²의 땅이 연방정부 신탁보호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몇몇 부족의 경우에는 당초 말살대상에 포함되어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다양한 형태의 저항노력을 펼쳐서 부족 주권을 지켜낸 사례도 있었다.

부족 주권 말살정책의 실패사례로는 메노미니 부족(Menominee)의 경우를 대표로 들 수 있다. 부족의 인디언보호구역에는 삼림자원이 풍부하여 이를 벌목한 후 부족 소유의 제재소에서 목재로 가공하여 판매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메노미니는 경제자립도가 가장 높은 인디언부족으로 분류되어 제일 먼저 말살정책 시행대상으로 선정되어 관련법(Menominee Termination Act)이 1954년 6월 17일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부족주권을 상실한 후 재산세 부담이 크게 늘어나 제재소 경영은 엄청난 적자를 시현하게 되고 부족민들 상당수는 빈민층으로 전락하여 정부의 복지 수혜대상이 되었다. 1973년 6월 말살정책이 끝났을 때에 실업률이 40%에 달하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말살정책 시행이전에 지출된 정부지원예산보다 훨씬 더 많은 복지비용이 말살정책 이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말살정책 시행으로 부족 주권이 완전히 사라지고 연방정부로부터의 지원이 끊긴 인디언들의 거의 전부가 교육과 의료부문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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