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4. 제로니모와 나바호의 천리 길 (3)
보스톤코리아  2016-05-02, 12:01:24 
그랜트 요새 대학살 (계속)
인디언들을 혐오하여 어찌해서라도 인디언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고 싶은 백인들에게 이 평화로운 마을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휘트먼 중위는 이 마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서 아파치 요새에 새로 조성된 화이트마운틴 인디언 주거지역으로 옮겨갈 것을 에스키민진(Eskiminzin)추장에게 권했으나 그들은 그 자리에 머물기를 원했다.

1871년 3월 7일과 29일 사이에 아파치 인디언의 습격으로 백인 정착민 19명이 피살당하고 10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불상사는 아라바이파족 인디언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산(Tucson)의 백인 거주자와 신문들은 피날과 아라바이파 인디언들의 소행이라고 헛소문을 내었다. 투산의 백인들은 회합을 가지고 이 기회에 그랜트 캠프의 인디언 마을을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극단적인 계획을 세웠다. 4월 28일 아침에 파파고(Papago) 인디언 용병 94명을 데리고 6명의 미국인과 42명의 멕시코인이 투산을 떠나 인디언 캠프로 향했다. 파파고 인디언은 피날 아파치와 아라바이파 인디언과는 오랜 숙적관계에 있었다. 

4월 30일 새벽에 투산 일당은 피날 인디언과 아라바이파 인디언의 캠프에 들이닥쳤다. 파파고 인디언 용병이 공격의 선봉에 섰다. 피날 인디언과 아라바이파 인디언은 이미 무기를 다 내려놓고 더 이상 백인에 대한 습격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이런 공격은 전혀 뜻밖이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사냥하러 산속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는 여자와 어린아이였다.  125명이 살해되었고 약 30명의 아이들이 파파고 용병에게 붙잡혀 가서 노예나 종으로 팔렸다. 에스키민진 추장도 그 캠프에 있었으나 운 좋게 현장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다. 휘트만 중위가 투산 일당들이 인디언 캠프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도착해 보니 이미 상황은 다 끝난 상태였다.

대학살 소식이 동부에 알려지자 많은 양식 있는 미국인들이 크게 분개하였으며 그랜트 대통령은 살인자들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지시하였다. 약 100명이 기소되어 대배심에 의하여 재판을 받았으나, 5일간의 심리 끝에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투산에 사는 백인 배심원들로부터 유죄 평결을 기대한다는 것은 당초부터 무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살아남은 인디언들 중 상당수는 다른 부족에 합류하여 백인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게릴라 전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연방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남부 인디언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인디언들에게 신뢰를 잃지 않고 있는 크룩 장군을 애리조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인디언문제담당국의 콜리어(Vincent Colyer)특사를 그랜트 캠프로 파견했다. 콜리어는 우선 에스키민진을 만났다. 다음으로 콜리어는 톤토 아파치족 추장 델샤이(Delshay)와 치리카우아 아파치족의 코치스 추장도 만나고 싶었으나 만나지 못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크룩 장군도 코치스를 직접 만나기 위하여 치리카우아 산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코치스는 뉴멕시코로 빠져나가버려서 만나지 못했다. 코치스는 뉴멕시코 사령관인 그레인저(Gordon Granger) 장군에게 앨라모사(Canada Alamosa)에서 회담을 갖자고 연락을 보냈다.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레인저가 인디언 주재소를 앨라모사에서 모골론산(Mogollons)에 있는 툴라로사(Tularosa)로 옮기기를 희망한다고 이야기한 데에 대하여 코치스는 앨라모사에 그대로 살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레인저 장군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재소를 툴라로사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코치스는 툴라로사로 가지 않고 그를 따르는 부족민을 데리고 애리조나 남동부의 치리카우아 바위산속으로 들어갔다.

아파치의 두 백인 친구
1872년 9월 백인 몇 명이 코치스가 은거중인 산을 찾아왔다. 전에부터 알고 지내던 제퍼즈(Thomas Jonathan Jeffords)가 하워드(Oliver Otis Howard) 장군을 데리고 코치스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제퍼즈와 아파치와의 인연은 약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퍼즈는 우편배달부였는데 아파치 인디언들이 우편마차를 자주 습격하는 바람에 생계에 타격을 받게 되자 혼자서 코치스의 본거지로 찾아왔다. 그는 개인적인 평화조약을 아파치와 맺고 싶다고 이야기하였다. 그의 솔직하고 용감한 행동에 감동을 받은 코치스는 그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제퍼즈와 동행한 하워드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게티즈버그 전투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남북전쟁 중에 팔 하나를 잃었다. 하워드 장군은 열하루 동안이나 아파치 요새에 머무르면서 아파치 인디언 추장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고 인디언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경험하였다. 하워드 장군은 코치스를 설득하여 리오 그란데강(Rio Grande)의 큰 주거지역으로 아파치족을 수용하고자 하였으나 코치스의 집요한 주장에 오히려 하워드 장군이 져 치리카우아 산 서쪽 편에 새 주거지역을 마련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새 주거지역의 주재관에는 제퍼즈가 선임되었다. 1874년 봄 코치스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퍼즈는 주재관을 그만두기를 원했으나 코치스의 아들 타자(Taza)와 나이치(Naiche)의 간청에 따라 계속 같이 있기로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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