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1
보스톤코리아  2015-05-18, 11:47:50 
1955년 4월 11일, ‘태권도’의 탄생일이다. 태권도라는 무도가 그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해방 전후부터 10여년 동안 수련해 오던 당수/공수도의 이름을 개명한 것이다. 최홍희가 작명한 ‘태권도’는 당시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무도계 전체에 받아드려지지 않았지만 또 한번의 강산이 변한 뒤, 1965년 그가 ‘대한태수도협회’(5.16군사정변 이후 부터는 ‘태수도’라고 불렀다)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태권도협회로 개명하여 지금까지 다시 변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작명한 ‘태권도’로 협회의 이름도 바꾸고 무도의 이름도 고착화 되었지만 그는 협회명과 무도명의 개명사건으로 회장직에서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되었다. 

1959년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태권도교본을 만들었다. 또한 동년 3월에는 19명의 사범들로 구성된 태권도 시범단을 인솔하여 월남, 대만 등에서 시범을 하며 태권도의 해외보급에 힘썼다.  그리고 동년 9월 3일에는 대한체육회 건물에서 6대문파들이 모여서 태권도를 널리 보급하여 국민들의 체력향상과 정신력을 배양하고 건전한 사회기풍을 진작하여 국민체육발전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였다. 당시 무도의 명칭 선택에 있어서 공수도로 하자는 관과 당수도로 하자는 관 등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청도관과 오도관의 합세로 ‘태권도’로 하였다.(초대 회장 최홍희, 부회장에 송무관의 노병직, 지도관의 윤쾌병, 이사장에 무덕관의 황기, 임원에는 청도관의 현종명, 고재천, 엄윤규, 남태희 등 4명과 이남석, 김순배, 조병시, 이영섭, 최동희 등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협회는 이듬해 일어날 4.19 전조의 어지러운 사회혼란상으로 인하여 대한체육회에 등록도 하지 못한채 미아처럼 헤매다가 5.16 군사정변 후 사회 유사단체 통폐합 포고령에 의해 없어지고, 거의 같은 무도인들에 의해 ‘대한태수도협회’가 창립되었다.

1960년 최홍희는 미국 텍사스에서 군사교육 중에 쌘안토니오(San Antonio)에 있는 이준구의 ‘가라데 도장’을 방문하여 가라데 대신 태권도의 명칭을 사용할 것을 건의했고, 이준구가 받아드리면서 이준구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태권도’를 사용한 무도인이되었다.(이준구는 그래서인지 자칭 ‘미국의 태권도 아버지’라고 한다) 당시는 교포들도 많지 않았지만 태권도(당수/공수 또는 코리안 가라데라고 불렀음) 도장을 운영하는 사범들도 소수였다. 
최홍희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화와 갈등, 마찰과 비난으로 결국 1972년 캐나다(토론토)로 이민하였다. 최홍희의 저서 ‘태권도와 나’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기 전에 박정희가 자신을 자주 찾아와서 시국을 논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같이 개혁하자고 상의를 했으며 결국 구체적인 내용까지 함께 모의를 하였다. 하지만 정작 거사를 이행할 때는 최홍희는 소외되었다. 당시 그는 논산 제2훈련소장으로 있었으며, 정변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난 후  박정희가 정변 결행시간을 모두에게 속였다며 실망하였고 배신감마저 느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장본인이었다면 요절을 냈을텐데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면서 체념을 했단다. 또한 그가 ‘혁명본부’를 찾았을 때 박정희가 런닝셔츠 바람으로 뛰어나와 포옹을 하면서 서울에서 실패하면 각하 계시는 곳(논산 제2훈련소)으로 가려고 했다며 반갑게 맞았다고 했다. 그 후 최홍희는 같이 ‘혁명’을 모의하고도 거사일에는 알리지 않음에 배신감과 불만이 더해갔고 또한 당시 군내의 최대 파벌인 ‘만주파’의 박정희가 자신이 속한 ‘이북파’를 몰아낼 것으로 생각하면서 불안정을 바탕으로 한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는 5.16정변 후 논산훈련소장에서 제6군단 군단장을 역임하고 그 이듬해 1962년에 예편하였다. 

1962년 최홍희는 말레이시아 대사로 갔다. 당시 박정희는 대통령에 출마하였고, 무도계에서는 5.16군사정변 후의 조치(포고령)로 인하여 사회단체 통폐합의 일환으로 ‘대한태수도협회’가 창립되었으며 초대 회장직에 1순위 였던 최홍희가 말레이시아 대사로 나가는 관계로 채명신장군(준장, 혁명위원회 감찰부장)이 추대되었다. 그는 대사로 나가기 전에 육군소장 전역환송연에서 박정희의장의 대통령 출마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간신들만 득실거릴거라는 독설을 주저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로 나간 후 그는 더 이상 박정희와의 접촉은 없었다. 그는 대사직을 수행하는 동안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태권도 시범을 통하여 태권도의 보급은 물론 외교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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