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64
보스톤코리아  2015-01-19, 11:35:04 
창무관의 창설자인 윤병인은 정통 무도인이었다. 윤병인은 체구는 왜소했지만 무도로 단련된 몸은 항상 혈기가 넘쳐났고 언행은 과묵한 편이었다. 또 멋을 부릴 줄 몰라 항상 신발도 큼지막한 미군 군화를 신고 다녔고, 왼손 손가락이 잘려나가 한여름에도 항시 흰장갑을 끼고 다녔다. 

그는 자신이 만주를 유랑하면서 섭렵한 무술인 주안파 권법을 제자들의 특성과 체력조건에 맞게 지도했다. 1946년 연무대회를 할 때 청도관 관원들과 함께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YMCA 권법부의 초창기 수련생은 500여명이나 되었지만 윤병인이 워낙 엄하고 강도 높게 수련하다 보니 3개월이 지난 후에는 180명으로 줄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윤병인은 한국전쟁시 행방불명이 되면서 이남석이 체신부에 공수도 도장을 차려 별도로 수련생을 지도하였다. 처음에 윤병인이 창설할 때는 ‘YMCA 권법부’라는 명칭이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남석과 김순배가 주축이 되어 ‘창무관’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창무관은 영창고등학교의 창彰자와 무도인의 무武자를 합쳐서 만든 것이고, 두 마리의 용을 상징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종우의 증언에 따르면 창무관 관명은 한국 전쟁 전에 윤병인이 벌써 ‘애칭’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YMCA 권법부 출신으로는 이남석, 김선구, 홍정표, 박철희, 박기태, 김주갑, 송석주, 이주호, 김순배 등이 있다. 
한편 2대 관장 이남석, 3대 관장 김순배와 뜻이 맞지 않았던 홍정표, 박철희는 창무관을 떠나 1956년 서울 신설동에 강덕원講德院을 개관하였다.

다음은 5대 문파의 마지막으로 송무관을 들려다 본다.100)  송무관松武館은 노병직盧秉直이 1946년에 개성 송악산에서 개관하였다. 송무관 창설자 노병직 관장은 일본 유학생 시절에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과 함께 송도관松濤館(쇼도칸)의 창시자 후나고시 기친船越義珍 밑에서 가라데를 배웠다. 해방 직전 고향인 개성에 돌아온 그는 당시 궁사장(활터)이었던 관덕정觀德停에서 젊은이들에게 심심풀이 삼아 가라데를 기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송무관을 창설하게 되었다. 노병직은 단신의 체구이지만 강인한 외모와 함께 지나치게 카리스마가 강해 제자들에게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항상 수련 1시간 전에 일찍 와서 아령과 역기 등으로 몸을 푼 다음 오른손과 왼손을 번가라가며 권고대(주먹단련대)에 정권주먹, 수도치기 순으로 단련을 했는데 그 가공할 완력에 제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노병직은 또 제자들에게 반드시 1백번 이상 권고대를 치게 한 다음 본격적으로 수련을 했는데, 4급 이상이면 꼭 실전대련을 시켰다. 또 타 도장과 마찬가지로 추운 겨울에는 모한수련冒寒修練을, 더운 여름에는 모서수련冒暑修練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송무관 출신으로는 이회순, 이영섭, 김홍빈, 한상민, 송태학, 이희진, 조규창, 홍영찬, 강원식 등의 많은 관원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5대 문파 중 관세가 가장 미약하였다.

송무관은 초대 관장인 노병직에 이어 2대 이영섭, 3대 강원식 등으로 이어왔다. 
이상이 해방 후 창설된 무술 도장의 5대 문파인 청도관, 무덕관, 조선연무관(지도관), YMCA 권법부(창무관) 그리고 송무관이다. 
다음은 초창기 5대 문파에 이어 창설되어 우리나라의 초창기 태권도의 보급과 발전 그리고 조직의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한 나머지 4대 문파101) 를 좀더 자세하게 들여다 본다. 이들은 오도관吾道館, 강덕원講德院, 한무관韓武館, 정도관正道館 등이다. 창설자 거의 모두가 5대 문파에서 수련을 했던 사람들로 한 뿌리를 두고 있다. 

먼저 오도관吾道館을 보자. 오도관은 군軍 장성 출신의 최홍희崔泓熙와 남태희南太熙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최홍희의 자신에 의하면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했고, 한일동으로 부터 택껸을 사사했으며, 일본 유학시절에 가라데를 배웠다고 한다. 최홍희가 1954년 제3군단(당시는 1군단이었음이 타 문헌으로 입증)에 배속되어 있던 용대리 본부에서 오도관을 창설하기 까지는 부관 남태희의 역할이 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홍희에게 남태희는 ‘보물급의 수하 인물’이었다. 남태희는 해방 직후 청도관에 입문하여 이원국으로 부터 당수도를 배웠다. 그리고 1947년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군軍과 인연을 맺었다. 미남형의 얼굴에 행정관리 능력이 뛰어났고, 당수도 동작이 일품이었던 남태희는 1953년 제주도 보병 제29사단에 있던 최홍희 장군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100) 참고 문헌: 태권도 현대사(강원식, 이경명 공저, 보경문화사, 1999), 태권도지도이론(김대식, 김광성 공저, 나남, 1987), 태권도의 역사 – 네이버 지식iN.

101) 이 4대 문파는 오도관, 강덕원, 한무관, 정도관 등이다. 이 모두 5대 문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합쳐 초창기 9대 문파 또는 9대관大館이라고 한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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