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27. 시가현( 滋賀縣)의 백제사(百濟寺)
보스톤코리아  2012-02-13, 13:17:16 
일본 최초의 여왕 스이코(592-628) 천황은 즉위하자 마자 방금 사망한 친오빠 용명(用明)천황의 둘째 아들을 태자와 섭정으로 책봉하였다. 그가 바로 스이코 천황을 보필하여 찬란한 아스카 불교 문화를 이룩한 성덕 태자다.

성덕 태자에게는 두명의 스승이 있었다. 백제 고승 혜총과 고구려 고승 혜자다. 나라 땅 아스카에 일본 최초로 아스카사가 건립됐을 때 두 사람이 함께 주지가 되었다.

혜자는 고구려 영양왕 6년(스이코 3년) 때 일본으로 건너와 그 다음해 서기 596년 아스카사 주지로 있으면서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당시 21세의 청년 성덕 태자는 혜자로부터 불경은 물론이고 걸인구제, 지하수개발, 사회복지 사업과 사천왕사 창건에 대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제일 중요한 가르침은 제왕이 백성들을 통치하는 데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우게 되었다.

성덕 태자가 후일에 일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군으로 추앙 받게 된 배경에는 고구려 승 혜자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혜자는 성덕태자의 자립심을 키워 주려고 함께 많은 여행을 하였다. 태자의 집 이카루카를 시발지로 하여 나라-우지(宇治)-시가라키-호동(湖東)-호북(湖北)-와카사(若狹) 에 이르는 코스를 많이 다녔는데 지금의 나라에서 시가현(滋賀縣)) 을 잇는 코스였다. 후세인들은 이 두 사제의 여행길을 “태자의 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여행중에 시가현(滋賀縣)석가산에 어리는 상서로운 기운을 보고, 성덕태자가 발원해서 지은 절이 시가현 백제사였다.

처음에는 구다라지라고 불리면서 백제 고승 혜총, 도흔, 관륵이 머물러 있었는데 후일 천지(天智)천황 때에 백제의 왕자가 묵게 된 다음에는 백제사로 부르게 되었다.

관륵은 백제 무왕 (602) 때 일본에 건너와 천문, 지리, 역법에 관한 책을 전하고 불법을 전수하다가 일본 최초의 대승정이 된 사람이다. 고구려승 혜자는 일본에 20년 체류하다가 서기 615년에 고구려로 돌아가게 되었다.
스승 혜자를 이별하고 상심하던 태자는 비와코(琵琶湖)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히에이산(比督山) 동쪽 기슭에 스승의 장수를 기원하는 서교사(西敎寺)를 세웠다.

혜자가 고구려로 돌아간지 5년후인 서기 622년 2월 5일에 성덕태자는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혜자는 몹시 슬퍼 하면서 1년 후 태자가 죽은 날에 자신도 죽을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 말대로 서기 623년 2월 5일에 혜자 역시 운명하였다.

백제사는 교토 동쪽에 있는 시가현 (滋賀縣) 애지군(愛知郡) 애동촌(愛東村)에 있다. 시가현에는 그 중앙에 비와코(琵琶湖) 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동쪽 호동(湖東)지방에는 수 많은 천년 고찰들이 있는데 백제사는 그 중에서 제일 오래 된 절이다.

절의 정문에는”오우미 호동에 있는 27 유명한 사찰” 중 11번(近江湖東27名刹 )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시가현을 예전에 오우미 (近江)라고 불렀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시가현 대신에 오우미로 부르고 있다.

백제사 산문에서 금당에 이르는 길은 400m에 이르는 돌담길인데 수백 개의 돌층계로 된 오르막 길이다. 가마쿠라 시대까지 돌담 양쪽에 300여개의 승방이 늘어서 있어 이 곳에 있는 중이 13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국시대 때 (1573)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대항하는 백제사를 공격해서 승방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층계 중간에 있는 중문에는 1m가 넘는 집신 두개가 걸려 있는데 이 짚신을 만지면 험한 길도 안전하게 갈 수 있다고 한다. 짚신은 일본 사람들이 사용하는 신발이 아니고 한반도 사람들의 신발이다. 필자의 생각에 시가현(오우미)에는 애초부터 백제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서 짚신이 매달려 있게 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돌담의 끝에는 원망(遠望)대라는 정자가 있는데 정서쪽으로 백제를 향하고 있어 오우미에 살고 있는 많은 백제인들이 망향의 동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곳 시가현에는 백제 도래인 클럽이 있어 매년 고국의 수도 부여, 공주를 다녀 온다고 한다.

백제가 망하고 나서 10만여 명의 유민들이 일본 열도로 몰려 들었는데 당시 일본은 천지(天智) 천황의 치세였다. 그는 백제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서명(舒明)천황의 아들이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했을 때 그의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과 함께 백제 부흥군 3만명을 파견한 사람이었다. 부흥 운동이 실패하고 백제 유민들이 몰려 들자 그들이 정착하도록 성심껏 도움을 준 사람이 천지 천황이었다.

당시에 백제 유민등이 제일 많이 정착한 곳이 시가현(당시 오우미)이었다. 그들은 오우미에서 여러가지 선진 기술을 가지고 일본의 산업발달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비와코 호수의 물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처음으로 시작했고 호숫물이 흘러 나가는 세타강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아 교토와 오우미를 육로로 연결시킨 것도 백제 사람들이었다. 지금 그다리 이름은 카라하시 또는 당교라고 부른다. 호수 주위로는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여럿 있는 것은 백제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정착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백제사 라고 불리는 절이 오사카 모모타니역 근처에 있는 관음사와 나가노현의 선광사가 있는데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히라가타역 근처에 있는 백제사 사적지는 이미 소개 한 바 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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