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고의 횡설수설 13 ] 목련꽃 그늘 아래서
보스톤코리아  2020-05-18, 11:12:17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박목월 시인의 <사월의 노래> 첫 구절이다. 이제는 그 시인도, 그 시도 너무 오래 되어서 기억의 소환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흐드러진 목련을 보면 파브르의 생물학적 조건반사처럼 생각나는 구절이기도 하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목숨을 끊은 슬픈 베르테르의 이야기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던 시절, 그 순수와 낭만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던가. 문학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었던 그 시절. 베르테르는 단연 나를 사로잡은 이름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베르테르와 목련이 이어진 것은 순전히 박목월 시인의 상상력에 기인한다. 매년 피고 지는 목련을 볼 때마다 나는 박목월이란 시인을 떠올리고, 뒤이어 베르테르란 가공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또 추운 겨울밤 이불 속에서 촛불에 기대어 시를 읽던 소년시절의 자화상을 떠올린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목련은 나에게 고귀함을 떠올리게 한다.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목련의 꽃잎을 보라. 아직은 봉오리인가 싶어 내일 꼭 봐야지 하다가 시기를 놓치면 꽃잎들은 어느새 스러지고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있다. 목련은 다른 꽃들보다는 생애가 짧아 그만큼 더 애틋하고 고귀하게 느껴진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백목련의 수려함을 보면서 조선 선비의 기풍을 짐작해보는 것은 과도한 상상력의 확장일까. 

풍성하기로는 뉴잉글랜드의 목련이 단연 갑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두 시. 끝없는 산들바람이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에 리듬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목련에서 느껴지는 수려함, 가냘픔, 순수함은 덜하지만, 대신에 이곳 뉴잉글랜드의 목련은 풍성함, 강인함, 선명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의 목련이 국민화가 박수근의 동양화 같은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면, 뉴잉글랜드의 목련은 루오의 선 굵은 표현주의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

목련은 종의 다양성만큼이나 자신이 가진 다른 이름으로도 색다른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목련을 보면서 조용히 “뮬란”이라고 말해보라. 어떤 느낌이 들까. 갑자기 우리의 상상력은 할리우드의 영화로 유명한 <뮬란>을 떠올리게 된다. 용감하고 지혜로운 뮬란이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여자임을 숨기고 잔인무도한 적들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병사가 되어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가는 전사가 된다는 중국 고전. 월트 디즈니사에서 1998년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고 올해 다시 영화로 재탄생했다. 목련의 중국어발음 뮬란은 이렇든 전혀 다른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목련의 영어이름 magnolia는 어떨까. 평생을 한국어 화자로 살아온 내게 이 이름은 낯설 뿐만 아니라 어떠한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다. 매그놀(Magnol)이란 식물학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라니 얼마나 재미없는가. 그 학자가 이름을 지어주기 이전에는 도대체 어떤 이름으로 불렸을까 궁금하기는 하다. 그에 비하면 목련(木蓮)이란 동양식 이름이 훨씬 더 운치가 있어 보인다. 나무 연꽃이란 뜻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연꽃처럼 깨끗하고, 고상하고, 담백하다. 물에 연꽃이 있다면 땅에는 목련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목련’이란 발음에서 느껴지는 아스라한 포근함과 그리움, 그리고 ‘뮬란’이란 발음에서 느껴지는 심청 같은 효녀의 이미지. 

목련꽃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든, 아니면 산들바람이 만들어내는 꽃잎들의 춤사위를 감상하든 다 좋지만 확실히 한 가지는 분명하다. 목련은 우리를 불러 세우고, 멈추게 하고, 느끼게 한다는 것.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목련은 다르다. 내가 그 꽃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목련은 먼저 나에게로 와서 나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바쁜 일상에 치여 내일은 꼭 짬을 내어 목련을 보리라 마음먹고는 잠시 시간을 놓친 날, 모두 낙화한 목련을 보며 느꼈던 낭패감이라니. 정말이지 목련은 바쁜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꽃이 질 때는, 마치 물러날 때를 아는 현자처럼, 한 순간의 지척임도 없이 한 순간에 지고 만다. 그 단호함이라니.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orugo4u@gmail.com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종교집회, 제조업은 이번 주, 미용실, 동물원은 다음주 2020.05.18
매사추세츠주가 18일 월요일 경제를 단계적으로 재개하기 시작한다. 종교집회, 제조업, 건축업은 18일부터 핵심업체에 속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제한적인 조건하에 재..
[ 오르고의 횡설수설 13 ] 목련꽃 그늘 아래서 2020.05.18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박목월 시인의 <사월의 노래> 첫 구절이다. 이제는 그 시인도, 그 시도 너무 오래 되어서 기억의 소..
좌충우돌 얼떠리우스의 어리바리 (실패한) 꿀벌 이야기(12) - 뉴햄프셔에서 2020.05.18
3) 말벌 집을 퇴치하는 방법(1) 벌집에 왜 뜨거운 물을 붓나? 왜 뜨거운 물인가? 삶으려고? 삶은 벌? 친구 목사님이 저희 교회에서 하신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
변화 속 Zoom Meeting에 적응하면서... 2020.05.18
두 달을 넘게 낯선 일상과 마주하며 답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언제쯤이면 나아질 것인가. 어느 때쯤이면 괜찮아질 것인가. 모두가 간절함과 기다림으로 있다. 집 안..
한담객설閑談客說: 이별과 격리 2020.05.18
측근과 이격. 손철주의 책에서 내눈에 띄였던 말이다. 측근側近은 귀에 익었다. 이격離隔은 말이 생소하다. 명사처럼 읽히는데, 네이버에서 찾았다. 사이를 벌여 놓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