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빛 (3)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05-07, 10:51:52 
‘아기가 나를 다 빨아먹는구나’라는 이 비상식적인 생각이 량의 몸속에서 부풀어져 가고 있었다. 량은 젖 먹이는 것을 포기했다. 이해할 수 없다며 남편이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기억이 끌려 나오기 시작한 이후 단 이 년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음식을 하면 가장 좋은 부분은 자신이 먹었다. 남편과 아들의 옷을 사야 할 때도 량은 자신의 옷을 먼저 샀다. 모든 친인척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옷은 빨아서 다리미질을 해서 입었지만 남편과 아들의 것은 대충 빨아 개지도 않고 옷장 옆에 놓아두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남편이 물어도 량은 아무 대답도 안 했다. 사라진 시간을 기억 못하고 살아도, 징그럽도록 끔찍한 기억들이 몽땅 기어 나와도 세월은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량 혼자만 시간의 다른 줄기를 잡고 걷고 있다고 느껴졌다. 량은 가끔 이명과 함께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난 말이에요. 달콤한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당신과 내 아들을 사랑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 계집애의 사무친 슬픔이 나를 갉아먹고 있어요. 난 그 계집아이의 식량이 되어야 해요.-

그 즈음부터 량은 사람들을 향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방법을 달리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지금까지 맺어온 관계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남편이 된 어린 남자는 변해가는 량을 집안에 붙들어 놓기 위해 애를 썼지만 량이 변해가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래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량의 몫이고 밖에 나가 돈을 버는 일은 어린 남자의 몫이었다. 어느 날 량은 눈을 반짝이며 어린 남자에게 온갖 교태를 다 부린다. 량의 무관심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량이 총기 어린 눈을 깜박이며 콧소리를 내면 어린 남자는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이제 오 개월이 되어 가는 아들을 번쩍 들어 올려 왼손으로 감아 허리에 올리고 오른손으로는 량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린 남자는 량의 목소리가 밝게 빛나면 금세 우울에서 빠져나와 가족을 지키는 장수 가 된 기분이 되어 한참을 산다. 그러나 그러한 량의 행동에 주기가 있다는 것을 1년쯤 지났을 때서야 알았다. 그 주기가 처음에는 여자들의 생리 주기라고 생각했다. 생리 전후로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생물학적인 변덕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그 주기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았다. 량은 남편이 봉급 봉투를 갖고 오는 날이 다가오면 행동이 변하기 시작하여 봉투를 손에 넣은 다음 날부터 예의 무관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남편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거듭한 후에야 돈을 어디에 썼으며 저축은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물었다. 단 한 푼도 모아진 것이 없다고 말하는 량의 표정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눈을 천진하게 깜박이며 품으로 기어들던 여자의 모습은 전혀 없고 밀랍 인형처럼 딱 한가지 표정으로 ‘돈 없어요.’라고 딱 잘라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 뒤로 어린 남편은 량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직접 집안 살림의 경비를 책임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관계 개선을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지만 량에게는 부부관계를 종결짓는 이유가 되었다.

량은 그 기억과 전쟁을 치르며 살았다. 그 기억이 가족 관계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듯한 느낌은 량에게도 가족에게도 고통이었다. 도서관에 가서 이와 유사한 병증을 찾아 보며 스스로 치료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전적으로 기억 속의 어린 계집아이의 편에 서 있는 자신을 종종 그 후로는 아주 오래 느껴야 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아주 그럴듯하게, 아주 멋지게 누가 보더라도 성공한 듯 살아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자 이 구차스러운 삶의 형태가 죽도록 싫었다. 구질구질한 동네도 싫고 방 하나에 모든 짐이 적당히 나뉘어 있는 것도 싫었다. 량은 남편의 월급을 아껴 쓰고 돈을 뒤로 모으는 것을 시작했다. 남편이 돈의 사용 용도를 물어 온 후 돈을 뒤로 모을 수 없게 되자 남편의 돈으로는 생활을 하고 량은 아들이 학교에 들어가자 일을 시작했다. 량이 버는 돈은 온전히 량의 주머니 속에서 쌓여 가고 있었다. 남편은 이제 거의 남처럼 사는 부부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도 허다하다. 량이 더 이상 어리고 착한 여자가 아니듯 어리고 착한 남자의 모습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량은 아들이 고등학교 들어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살뜰한 모성은 포기했다 해도 최소한의 책임은 다 하고 싶었다. 아들과 아무런 잔정이 없었지만 그게 아들의 잘못은 아니다. 량은 아들에게 미안했지만 그 미안한 마음은 만들어서 생긴 것이다. 촉촉하게 가슴에 젖어들지는 않았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운 공감의 마음은 푸석푸석하게 말라 있었다. 그중 사회생활에 필요한 몇몇의 마음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4월의 뿌연 황사가 가득한 어느 날 량은 서서히 계획을 실천했다. 
(다음 호에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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