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와 왕망을 연결해준 효원황후 왕정군 (孝元皇后 王政君: BC 71~AD13)
보스톤코리아  2014-11-10, 13:54:09 
효원 황후 왕정군은 한나라 10대 황제 원제의 황후였다. 18세 때 궁녀로 입궁하여 원제의 황후가 되었고 84세로 임종할 때까지 그녀는 7명의 황제를 겪었고 다섯 황제의 죽음을 권력의 정상에서 지켜본 한나라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후일에 한나라를 뒤엎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은 왕정군의 남동생 왕만의 아들이었다.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金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형부가 왕망으로 왕씨와 김씨는 사돈지간이 된다. 

당시에 황후로 간택되려면 규수의 집안이 명문세가 이든지 규수의 미모가 아주 출중하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왕정군의 집안은 행세하는 집안이었지만 그렇게 대단한 명문세가는 아니었다. 미모 역시 평범하였지 미인에는 들지 못하였다. 그녀가 황후가 된 것은 운이 아주 좋아서 황후가 되었다. 

한선제는 황제가 되기 전에 평민 출신의 허평군(許平君)과 결혼하여 유석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허평군이 곽광의 처 현아에게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이미 말한 바 있다. 

선제가 황제가 되자 유석이 자연스럽게 태자로 지명 받았다. 당시에 유석은 사마씨라는 태자비와 금슬 좋게 살고 있었는데 그만 사마씨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죽기 전에 사마씨는 태자에게 “첩은 원래 죽을게 아닌데 다른 비빈들이 저주해서 죽는다”는 원한에 찬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태자는 비빈들을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상심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일반 가정의 남자라면 부인을 잃고 홀애비로 지내도 탓할 수 없지만 일국의 태자는 후사를 이을 다음 왕손을 출산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가 있기 때문에 홀로 지내는 것이 허용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왕 효선제는 태자를 폐위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태자 유석의 계모 왕황후는 정숙한 여인이었다. 태자가 빨리 여자를 가까이하여 소생이 출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궁녀 5명을 뽑아 그 중에서 한 명을 태자가 지명하기로 하였다. 그 5명 중에서 한 명이 왕정군이었다.

하지만 태자 유석은 여전히 죽은 사마씨를 생각하며 비통해 있었기 때문에 앞에 서 있는 다섯 명의 궁녀들 중에서 태자비를 선택할 의욕이 전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여자들을 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제일 가까이 서 있는 궁녀를 가리켰는데 운 좋게도 그 여자가 바로 왕정군이었다. 

왕정군이 태자비로 간택은 되었지만 태자는 왕정군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딱 한번 들렸는데 운 좋게도 임신하였고, 또 운 좋게도 아들을 출산하였다. 

태자 유석의 무관심 속에서 황손이 태어났지만 한선제는 몹시 기뻐하며 친히 유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유오는 후일에 한나라 11대 성제(成帝)가 된다. 

궁중에서는 아들이 귀해지면 어머니도 귀해지는 법이다(母以子貴).
왕정군이 후사를 이을 황손을 운 좋게 맨 먼저 출산한 공(?)으로 태자 유석이 효원제(孝元帝)로 즉위하자 당당하게 효원황후가 되었다. 태자 유석은 황제가 되기 전에 좋아하는 후궁이 두 명 있었는데 부씨(傅氏)와 풍씨(馮氏)였다. 왕정군이 유오를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부씨는 유강(劉康)을 낳고 풍씨는 유흥(劉興)을 낳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왕정군의 아들 유오가 이미 태어났기 때문이다. 

원제는 왕정군의 소생 유오가 황태자가 되고 왕정군이 황후로 정해진 뒤라서 황후 다음가는 소의(昭儀)라는 명호를 따로 만들어 부씨, 풍씨를 소의로 삼았다. 

왕정군은 황후라는 명호는 있었지만 제대로 대우를 못 받고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BC33년에 한원제가 4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아들 유오가 한성제로 즉위하니 왕정군은 황태후가 되어 전권을 휘어잡게 되었다. 한성제의 효성황후(孝成皇后)는 허광한 집안 허가(許嘉)의 딸을 취해 황후로 책봉하였다. 그녀는 딸을 낳았지만 곧 사망했고 그 이후로는 소생이 없었다. 

한성제가 황제가 되면서 민심이 불안해졌는데 세인들은 그 탓을 후사가 없는 허황후에게로 돌렸다. 

허황후에 대한 한성제의 총애도 시들어가자 허황후의 친언니 허알은 황후에 대한 황제의 관심을 찾으려고 이미 한성제의 아이를 가진 후궁 왕미인과 왕봉 등을 저주하곤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탄로나자 황태후 왕정군이 크게 노하여 허알 등을 사형에 처하고 허황후는 폐위되었다.

이처럼 왕정군은 황후로는 별볼일 없었지만 한원제가 사망한 다음에는 황태후가 되어 한나라 제일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라비 왕봉을 대사마 대장군으로 봉하여 전권을 장악하게 하였고 자신의 5형제들을 같은 날 한꺼번에 제후로 봉하였다. 후일에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도 24세의 나이로 등용되었다가 38세 때는 대신으로는 최고 지위인 대사마 대장군이 되었다. 이는 그의 숙부 왕봉, 왕상, 왕음, 왕근에 이어 왕씨로는 5번째로 보정 대신이 된 것이다. 

BC1년에 왕망은 9살 밖에 안된 평제(平帝)를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가 4년뒤에 평제를 독살하고 2살짜리 유영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다가 AD8년에 한나라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천명을 받들겠다는 뜻을 선포하였다.

왕망은 왕순을 왕정군 태후의 거처로 보내 황제 권력의 상징인 옥새를 받아오게 하였다. 왕정군이 격노하여 왕망을 욕하였지만 이미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옥새를 꺼내 힘껏 땅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치기를 “가져가거라, 난 늙었으니 곧 죽지 않겠느냐? 내 죽어 너희들 가족을 모두 멸할 것이니 두고 보거라.”

말이 씨가 된다고 왕망은 AD9년에 황제가 되었다가 14년만인 AD23년 후한 광무제의 군사에게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사유로 왕망의 핵심 지지 세력인 김씨들은 광무제의 보복을 피해 중국을 떠나 야만했었던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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